유준과 정아 모두 자기가 살던 시간대의 모든 것을 버리고 시간이동을 하려고 한다.
유준에겐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유준은 유학 생활 중 슬럼프를 겪어 한국에 왔다. 엄마와의 대화를 통해, 피아니스트로서의 커리어를 쌓는 것은 엄마의 바람이고 유준은 그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찾고 있음이 드러난다. 엄마와 이혼한 아빠도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조언을 해준다.
영화가 끝나고 '아빠는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원작의 아빠가 샤오위의 시련에 책임이 있는 것은 이런 생각이 덜 들게 하기 위한 장치였을 것이다. 리메이크작에선 이 장치를 포기하고 아빠를 장난기 있는 감초 역할로 바꾸었다. 아빠를 남겨두고 떠난 것에 대한 개연성 문제는 있겠지만, 정아를 살리기 위한 시간여행이라는 점에서 유준의 시간여행엔 나름의 동기가 있다.
그러나 정아에겐 이유가 없다. 원작에서처럼 어머니의 정신병자 취급도, 담임 선생님의 무책임한 조치도, 학교에서의 따돌림도 없다. 오히려 정아와 엄마가 잘 지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는 정아의 시간대에서 젊은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며, 유준의 시간대에서 늙은 엄마의 모습과의 대비를 보여주기 위한 장치이다. 그러나 정아가 자기 시간대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시간이동을 하려고 한 순간 그 장치는 악수가 되어버린다.
왜 이런 아쉬운 선택을 했을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원작에 나오는 담임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정아의 사적인 상담 내용을 발설하는 것, 억울하게 정신병자 취급당하는 것, 학교에서의 따돌림 등은 요즘엔 진부한 내용이다. 클리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남주인공로부터 도망 다니는 여주인공이 알고 보니 시한부였다는 내용도 클리셰의 한 예시이다.
클리셰는 많이 쓰일수록, 관객에게 각인될수록 진부해진다. 처음 보는 신선한 연출도 시간이 지나면서 클리셰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리메이크란, 원작의 좋은 부분만 남기고 현시대의 트렌드에 맞지 않는 부분은 개선하는 작업이다. 감독의 의도는 그런 것 아니었을까? 관객이 진부하게 느낄 만한 부분을 개선하려고 했지만, 아예 빼버리는 실수를 해버린 것이다. 원작의 후반부에 여주인공의 과거를 너무 질질 끌면서 보여준 느낌이 들기도 했던 만큼, 그 부분을 아예 없애는 대신 줄이려는 시도를 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빠른 템포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래서 리메이크작의 엔딩 장면은 나쁘지 않았다. 정아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아예 빼버린 만큼 빨라진 템포와, 과거로 돌아가기 위한 빠른 연주의 조화에서 원작과는 다른 매력을 느꼈다.
어떤 부분에선 원작이 더 낫고, 어떤 부분에선 리메이크작이 더 나았다. 원작과 비교해도 장단점이 있다는 점에서 잘 만든 영화다.
원작을 보지 않고 리메이크작을 먼저 보았다. 리메이크작의 피아노 장면을 보고 '이게 뭐지?' 싶었다. 원작의 해당 장면을 본 이후, 이 영화를 추천할 때 영화는 재밌는데 피아노배틀은 기대하지 말라고 말하고 다녔다.
원작의 경우 남자 주인공인 주걸륜 배우가 감독, 각본, 주연을 모두 맡았다. 피아노를 치는 장면은 모두 대역이 아니라 그가 직접 친 것이었다. 피아노를 잘 아는 사람이 만들었기에 그 유명한 피아노 배틀 장면이 나올 수 있었다.
반면 리메이크작의 피아노 배틀은 원작의 장점은 모두 빼고, 성의 없는 연출을 보여주었다. 피아노 내부를 통과하는 원작의 카메라 무빙은 빼고, 피아노 배틀을 구경하는 대학생이 찍은 것 같은 연출을 보여주었다.
촬영뿐만 아니라, 연주 진행자도 없어지고 경쟁 상대의 경쟁심도 없어졌다. 그저 그런 피아노 연주 장면으로 전락해 버렸다.
장면을 연출할 때 등장인물과 사물을 어떻게 활용할까 고민한 흔적이 없어서 성의 없는 연출이라고 말했다. 연주하는 곡이 얼마나 어려운 곡인지 어떻게 표현할까, 피아노 내부의 복잡한 구조를 살피며 어떤 연출을 해볼까, 하는 그런 고민들이 없었다. 원작을 제작하며 이루어진 고민들을 리메이크작에선 묵살해 버렸다. 하다못해 원작을 그대로 따라했다면 어땠을까. 라붐의 헤드셋을 껴주는 명장면을 오마주할 여유는 있으면서 왜 가장 중요한 피아노 배틀은 이렇게 돼버린 걸까?
피아노 배틀 장면만 본다면 이 영화는 최근 개봉한, 개봉할 다른 영화들과 비슷한 평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피아노 배틀을 제외한 다른 장면들은 원작과 비교해도 나은 부분이 있을 만큼 잘 다듬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의 없는 피아노 배틀이라는 결점을 가지고도 호평을 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피아노 배틀이 이런데도 좋은 평을 받을 만큼 잘 만들었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아쉽다.
피아노 배틀을 이렇게 연출한 감독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이 궁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