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극인의 상춘곡은 우리나라 가사 문학의 효시라고 합니다. 아니라고 하는 학자들도 있는 듯 합니다. 그러나 가사문학이라는 장르는 지금 없습니다. 언제인가 전해 내려오기를 그친 것이지요. 가사는 무엇이며 왜 현대에서는 가사라는 장르로 쓰고 읽지 않는 것일까요?
이러한 생각으로 정극인의 상춘곡을 구하여 찬찬히 읽어보니 화려한 표현과 상투적인 표현이 뒤섞여 있는 것과, 현대문으로 번역되어 있는 글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용감하게 번역하여 보았습니다. (원문과 번역문은 글 끝에 매달려 있습니다.) 옛날 글로 쓰여진 모든 문학작품은 현대글로 번역하여 누구든지 쉽게 우리 옛 사람들의 작품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통을 벽장 안에 모셔두면 무슨 소용 있을까요?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은 오늘날 대한 해군만이 가지고 있는 반잠수식 공격함정의 형태로 바뀌어서 전승되어 나가야 한다는 생각과 같습니다.(해군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상춘곡에서 나오는 중심되는 생각은 정극인이 어느날 갑자기 발명한 것이 아닙니다. 공자의 이야기를 적은 논어에 비슷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논어는 기원적 450년경의 이야기이고 상춘곡은 기원 후 1450년 경 쓰여졌으리라 짐작됩니다. 약 이 천년동안 내려왔던 사상이지요. 생각이 오래되면 말도 그러합니다. 손 때가 묻어서 반질반질해 집니다. 상춘곡에서도 그런 표현이 많습니다.(외워두면 시험 공부하기 쉽습니다.)
글의 구조는 너무나 단순합니다. 가사문학의 특징이라는 생각입니다. 나중에 다시 상세히 쓰고 싶지만, 우선 먼저 말한다면, 가사는 歌와 辭이기 때문입니다. 운문인척 하는 산문. 우는 척하면서 말하기, 곡(哭)하면서 할 말 다하는 상주, 이런 것이 가사라고 봅니다. 이런 전통은 나중에 송강 정철이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 등을 쓰면서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내지요.
차근차근 한 꼭지씩 정리해 볼 생각입니다.
(상춘곡. 현대문 번역-김연신)
붉은 티끌 속 묻힌 분들, 내 생활이 어떠한고
옛 사람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한 이 많건마는
산림에 묻혀 있다고 즐거움을 모를 것가
푸른 시내 앞에 두고 작은 띠집 지어내니
소나무 대나무 빽빽하고 바람, 달이 내 것일세
엊그제 겨울 지나 새봄이 돌아오니
복숭아꽃 살구꽃 해 저물녘 피어 있고
푸른 버들 고운 풀은 가는 비 속 더욱 푸러
칼로 잘라냈나 붓으로 그려냈나
자연의 신묘함이 사물마다 요란하다
수풀 속 우는 새는 봄기운 못내 이겨
소리마다 꼬여내도다
이 몸 또한 자연이니 흥이야 다를소냐
사립문 밖 걸어서 정자에 앉아 보니
걸으며 노래 부르며 하루가 적적한데
한가할손 깊은 맛 아는 이 없이 혼자로다.
이봐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꾸나
걷는 것은 오늘 하고 목욕은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캐고 저녁에 낚시하세
갓 괴여 익은 술을 칡수건에 받아 놓고
꽃나무 가지 꺾어 헤어가며 먹으리라
봄바람 건듯 불어 푸른 개울 건너오니
맑은 향기 잔에 지고 붉은 꽃잎 옷에 진다
술동이 비었거든 나에게 아뢰거라
작은 아이 함께 주가에서 술을 얻어
어른은 막대 짚고 아이는 술을 메고
나직히 시 읊으며 천천히 걸어와서 시냇가에 혼자 앉아
밝은 모래 맑은 물에 잔 씻어 부어 들고
맑은 시내 굽어보니 떠오는 것 복숭아꽃
무릉이 가깝도다 저 들판이 그것인가
솔숲 작은 길에 진달래꽃 부여잡고
봉우리에 급히 올라 구름 속에 앉아 보니
수많은 촌과 부락 곳곳에 펼쳐있네
빛나는 햇살 아래 안개와 노을,
비단에 수놓아 펼쳐 놓은 듯
엊그제 검은 들에 봄빛이 넘쳐난다
공명도 날 꺼리고 부귀도 날 꺼리니
청풍명월 외에 어떤 벗이 있을고
대나무 밥그릇 표주박 물 길거리에서 먹어도
헛된 생각 아니 하니
아무튼, 일평생 즐거움이 이만한들 어떠하리
[연 구분은 장덕순 교수님 책 '고전국어정해'에서 차용. “칼로 잘라냈나”의 표현은 “칼로 말라냈나”가 원어이나 현대에서는 마르다, 마름질, 말라내다라는 표현이 희귀하므로 그냥 쉽게 ‘잘라냈나’로 함. 좀 아쉬움.]
상춘곡에서 얼른 눈에 뜨이는 두 가지 대비되는 장소는 (고어 원문 기준) 첫 연의 홍진紅塵세상과 셋째 연 하단에서 위로 여섯째 줄(연 구분은 장덕순 교수)의 무릉도원입니다. 홍진세상은 누가 살고 무릉도원에는 누가 살까요? 홍진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어디에서 자며, 무릉도원 사람들은 어찌할까요? 홍진세상에서 무릉도원으로 건너갈 수 있으며, 또 무릉도원에서 홍진세상으로 건너 올 수 있을까요? 아니면 홍진세상 주민들은 홍진 애기를 낳아 기르고 무릉도원 시민들은 무릉애기를 낳아 기를까요? 그들이 각각 다른 종족이라면 가끔 싸우기도 할까요? 무엇보다도, 홍진세상은 어디 있고 무릉도원은 어디에 있을까요? 상춘곡을 읽고 또 읽으면서 글자로 적힌 단어마다 의문을 가지면 무수히 많은 질문이 나옵니다. 이런 의문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서 처음 펼쳐 보는 책이 논어입니다.
논어 선진(先進)편에 보면 공자가 제자 몇 명에게 말을 시킵니다. ‘너희들의 잘하는 점 혹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경쟁력 있는 점이 각각 무엇이냐?’하고
자로라는 제자는 ‘국방을 잘 합니다’라고 대답하고(이 때 공자가 피식 웃었다고 깨알같이 적혀 있습니다.) 염유라는 제자는 ‘나라의 규모가 너무 크지 않다면 경제를 부흥시킬 수 있다’하고(남한의 약 반만한 땅을 염두에 두었습니다), 또 어떤 제자는 잘 하는 것이 있다기보다 나라 안팎의 예의 절차를 더 배우고 싶다고 합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공자가 증석이라는 제자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떠냐?”
증석이 대답합니다.
"늦봄에 봄옷을 입고 어른 5~6명, 작은 아이 6~7명과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기우제 지내는 제단인 무우에서 바람 쐬고 노래하면서 돌아오겠습니다.”
전혀 엉뚱한 대답에 공자는 감탄합니다.
"나는 너와 같이 하겠다.”
(이기동. 논어강설, 성균관대출판부, 336쪽)
어렴풋이 드러납니다. 홍진세상의 일은 국방, 경제, 외교절차 이런 것들이고 무릉도원에서의 일은 야외에서 목욕하고 노래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 논어에서 증석이라는 제자가 한 말 중 몇 몇 단어는 상춘곡에서도 보입니다. 작은 아이, 노래하기, 목욕하기(답청하고 난 다음 날 하자고 했지요.) 논어가 쓰여진 것은 기원전 약 400년, 유교가 한반도에 들어온 것은 서기 1000년경 고려 중기. 정극인이 상춘곡을 쓴 것은 약 1450년입니다. 저 때의 지식인들은 저 공자와 제자들의 이야기를 한 글자도 틀림없이 모두 외우고 있었습니다. 과거시험에 되풀이 되어서 나왔으니 외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극인이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상춘곡을 쓰면서 자연스럽게 녹아들어갔겠지요. 이렇게 남의 생각을 빌려오면 여기저기에서 정합(整合)되지 않는 부분이 튀어 나와서 덧대고 이은 부분이 필연적으로 눈에 뜨입니다. 천의무봉은 아니라는 거지요. 크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다음에 쓰겠습니다.
3.
상춘곡의 첫 시작은 질문입니다. ‘붉은 먼지 속에 사는 분들 내 생활이 어떠합니까?’하고 일단 물은뒤, 그 생활이 ‘옛 사람의 풍류’에 근접해 있는지 비교해 달라고 합니다. 고어 원문으로 옮기면 '紅塵에 뭇친 분네 이 내 生涯 엇더한고 녯 사람 風流를 미찰가 못 미찰가”입니다. 이 말을 듣는 사람들 즉 붉은 먼지 자욱한 속에는 어떤 사람들이 살았을까요?
정극인이 상춘곡을 쓴 것은 벼슬살이하다가 물러난 1470년 이후라는 것이 학자들의 생각인 듯 합니다. 1401년생이니 칠십 줄에 쓴 글이지요. 그 시대 사람들로서는, 특히 공무원이라면, 피할 수 없는 사건이 있습니다. 1453년 10월 10일에 일어난 계유정난입니다. 아시다시피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보위하는 김종서와 그 일파를 살해한 사건이지요. 김종서는 수양대군이 직접 찾아가서 죽이고 그 후 미리 만든 살생부에 따라 정적들을 궁궐에 회의 있다고 불러서 입궐 족족 살해합니다. 세조가 되어 즉위하는 것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455년입니다. 우리가 사육신 이야기로 잘 알고 있는 성삼문 등의 항의와 죽음이 이 때 일입니다. 같이 공무원 생활하던 신숙주가 수양대군 편에 붙어서 출세도 하고 돈도 많이 모은 것도 이 때 일이지요. 홍진세상에 대격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 뒤에 쓴 글이 이 상춘곡입니다. 정극인은 계유정난 일어난 바로 그해 1453년 52세의 나이에 궁궐에서 치러지는 과거에 6등으로 합격하여 본격적으로 고급공무원 생활을 시작합니다. 공무원 생활은 28세부터 하였으나 모두 과거를 통하지 않은 하급관리 생활이었습니다. 52세에 급제 후 1470년 즉 고희가 될 때까지 이 벼슬 저 벼슬을 합니다. 성삼문과 같이 세조에 저항하다가 유배 갔다는 등의 기록은 없습니다.
1453년의 일이 너무 멀어 보이면 1979년 12월 12일의 사건이 있습니다. 그해 10월 26일 만찬장에서 살해 당한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사건을 조사하던 전두환 소장이 합동수사본부장의 자격으로 자기의 상관인 정승화 대장을 체포한 하극상이자 쿠테타 사건이지요. 그 이후 1980년 518 광주사태가 터지고 전두환의 집권으로 군사정부가 연장됩니다. 홍진세상에서 흔히 일어나는 일인 모양입니다.
이런 일들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이 있습니다. 기원전 약 300년에 “어부사(漁父詞)”라는 글을 쓴 굴원(屈原)입니다. 굴원과 고기잡는 어부의 대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어부가 충고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취해 있다면 어찌하여 당신도 술찌꺼기라도 먹고 조금 취하지 않는가?’ 굴원이 대답합니다. ‘어찌 이 깨끗한 내 몸에 속세의 먼지가 들어오게 하겠는가?’ 어부가 말합니다.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벼슬하러 나가고)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겠네(벼슬을 하지 않고 유유자적하겠네)’ 이 글을 쓴 굴원은 자신의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여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고 합니다. 홍진세상에 살 것이냐 무릉도원에서 살 것이냐는 쉬운 문제가 아니었던 모양입니다.
다시 정극인으로 돌아가서, 그는 홍진세상에서 산 사람일까요, 무릉도원에서 산 사람일까요? 젊어서는 홍진세상에서 살다가 은퇴 후 무릉도원에 전원주택을 만든 사람일까요?
공부를 더 깊이하고 자료를 더 찾아보면 더 잘 알게 되겠지요.
(사족)
1970년대부터 몇몇 법대생의 고민은 이 홍진세상으로 나아가는 관문인 국가고시를 준비할 것이냐 말 것이냐였다고 합니다. 다행히 그 시대는 산업이 날로 발달하고 있어서 다른 홍진세상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운 좋은 청년들이었습니다.
4.
정극인은 상춘곡에서 홍진세상에 사는 사람들에게 지은이의 사는 모양을 보아라 뻐기면서, 자기가 살고 즐기는 자연의 모습을 그리다가 급기야 여기가 바로 무릉도원이다 즉 자기가 즐기고 사는 이 곳이 바로 무릉도원이라고 선언합니다. 세 번 째 연 뒷부분에 보면 고어 원문으로 “淸流를 굽어보니 떠오나니 桃花로다. 武陵이 갓갑도다 저 뫼이 귄 거인고”
(ㅁ 다음 중성으로 아래 아, 그 뒤 종성으로 ㅣ 라고 쓰면 들판이라는 뜻이고 그냥 ‘뫼’라고 하면 산이라는 뜻입니다. 고어가 구현되지 않아 혼용하였습니다.
문법 하나 더, 들판을 나타내는 뫼는 ‘ㅎ종성체언’입니다. 즉 철자를 완전하게 쓰면 “뫼ㅎ”라고 써야 합니다. 후대에 오면서 ㅎ 이 떨어져 나가서 ‘뫼’만 남았습니다. 수퇘지. 암퇘지, 이런 단어에 ㅎ 발음이 들어가는 이유가 모두 ‘수’ ‘암’이 ㅎ 종성체언이기 때문입니다. 각설..)
정극인은 봄경치를 찬미하고 새우는 소리에 경탄하면서 집을 나섭니다.(시비를 거러보고 정자에 안자보니~) 물가에서 술도 한 잔하다가 술을 다 마셔서 술도가에 가서 다시 받아 옵니다. 문득 개울물을 보니 붉은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옵니다. 복숭아꽃은 무릉桃원을 떠 올리게 합니다. 혹은 이 모든 것이 그의 머리 속에 있는 관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시 들판의 개울에서는 복숭아 꽃잎이 떠내려 오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여하튼 시상은 그렇게 흘러갑니다. 이후 시점은 산봉우리로 올라가서 마을 전체의 평화로운 풍경이 펼쳐집니다. 천촌만락, 천 개의 마을 만 개의 부락이 펼쳐져 있고, 연하일휘, 안개와 노을이 비단에 수를 놓은 듯 하답니다. 이 모든 아름다운 광경이 사람 사는 곳의 모습입니다.
여기서, 그 때 까지 혹은 그 때 이래로 현재까지 알려진 무릉도원의 관념과 정극인의 관념은 판이하게 달라집니다. 보통의 무릉도원 이야기에는 어떤 어부가 강에서 고기를 잡다가 복숭아 꽃잎 떠내려 오는 것을 보고 따라 가 보았더니 낯선 세상이 나타나서 속세를 잊고 잘 놀다 왔다라는 것이지요. 한국 가곡 “금강에 살어리랐다”에서 나오는 ‘금강’도 무릉도원입니다. (그 노래에도 홍진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금강산 앞 삼일포에는 사선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신라 시대 화랑 네 명이 삼일간 놀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이 네 명의 화랑을 사선이라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영랑이라고 하는 데 지금 강릉 경포대의 영랑호가 거기서 나온 이름입니다. 네 명의 화랑이 강릉 경포대에도 왔답니다. 어쨌거나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현실이 아닌 세계에서 잠시 놀았다는 것과 (부득이하여) 속세로 돌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정극인의 무릉도원은 다릅니다. 우연히 걷다가 보니 들판이 보여서(집 앞에 있던 논이겠지요.) 쳐다보니 여기가 무릉도원이더라는 것입니다. 무릉도원은 너무 현실과 가깝습니다. 진입하는데 아무 장애가 없습니다. 무릉도원 속에서 언덕에 올라보니 천 개의 마을 만 개의 부락이 모두 아름답습니다. 이것은 무릉도원, 환상의 세상이 아니라 현실이 곧 낙원이라는 것입니다. 정극인은 어떤 사람이길래 현실이 낙원이라고 하였을까요? 조선왕조실록을 잠깐 봅니다.
1455년 세조 등극하던 해 원종공신 3등으로 책봉됩니다. 몇 백 명이 명단에 올라갔습니다만 결코 작은 일은 아닙니다. 부상으로 본인은 일 계급 특진, 자손은 공무원으로 특채, 앞으로 죄가 있으면 너그럽게 용서한답니다. 여하튼 황보인, 김종서가 타살당한 계유정난이 정극인에게 반드시 나쁜 일은 아니었습니다.(그 해 1453년에 과거에도 붙었지요.)
1469년. 68세 되던 해에 사간원 정언으로 제수 받습니다. 사간원 정언은 요새말로 언론사 주필 정도 되는 자리입니다. 본인에게 큰 영광입니다. 그 후 사간원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마지막으로 돌아가시기 전 1480년 성종 시대에 상소문을 올리기도 합니다.
즉, 정극인은 28세 되던 해부터 관료였다가 80세 되는 해까지 친체제 관료였습니다. (어떤 분은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하느라 벼슬에서 물러나와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글이 상춘곡이라고 하는데 동의할 수 없습니다.)
정극인은 현실 속에 무릉도원 즉 이상 사회가 건설되기를 바랐고 또 현실이 무릉도원이라고 주장하였다고 봅니다. 한반도의 북쪽에서 “수령님 계신 곳은 우리의 낙원, 아무런 부러움 없어라.”하고 노래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더 생각해야할 질문이 있습니다. 현실이 무릉도원이라면 홍진세상은 어디에 있으며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도대체 어떤 불경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길래 이렇게 비단에 수 놓은듯 아름다운 세상을 외면하고 붉은 먼지 자욱한 가운데에서 살아가는 불충(不忠)을 서슴없이 자행하고 있을까요? 그래서인가요? 상춘곡의 첫 줄은 “홍진에 사는 분들, 내 생활이 어떠합니까?”하는 당돌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여기까지 읽고 보니 정극인의 상춘곡이 무시무시한 정치적 선언문으로 읽힙니다.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속세를 벗어나서 아름다은 자연을 즐기는 한가한 마음” 정도로 빨간 연필로 밑줄 그어 놓고 지나가면 세상은 그야말로 무릉도원이겠지요.
문학이 치열한 것이라는 말 안에는 무서운 것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5.
상춘곡이 유명한 이유는 우리나라 최초의 가사문학 작품이라는 이유가 압도적입니다. 그 전에 나옹화상이란 분이 고려시대에 불교의 교리에 관한 작품을 썼으므로 상춘곡이 최초 작품이 아니다 라든가, 상춘곡의 표현들이 당시의 표현 방법이 아니다 등등 학설이 분분합니다. 필자의 관심은 가사(歌辭)형식은 무슨 이유로 조선 시대에 풍미하였다가 현재에는 사라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요즈음 어떤 시인도, 어떤 소설가도 가사 형식으로 글을 쓰지 않습니다. 4.4.조 율격, 음보. 등등 이런 식으로 쓰는 소설도 없고, 시도 없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요?
가사문학의 시작과 전개에 관해서는 많은 국문학자들이 잘 정리해 둔 것 같습니다. 조선 초기부터 시작하여 조선 후기에 매우 왕성하게 발달하였다가 근대에 와서 가사로 작품을 쓰는 경우가 급격하게 줄었습니다. 신문이 발달한 것과 상관이 있다고도 합니다. 모두 깊이 파고 들어갈 만큼 재미있고 의미있는 주제입니다. 그러나 창작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신 분은 드문 것 같습니다. 가사가 왜 쇠퇴하였고 지금은 쓰여지지 않는가 하는 물음은 가사가 시인가 산문인가하는 구분과 밀접한 연관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 왕성하게 쓰여졌던 시조는 아직도 살아남아서 당당하게 문학의 한 장르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시조와 비교하여 보면 가사가 가지는 어떤 특징이 근대 이후 더 이상 가사를 존속할 수 없게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우선 두 가지의 가상의 작품으로 예로 들어 봅시다.
후배들아 선배들아 사람들아 귀신들아
한날 한시 물에 빠져 진도 바다 헤매이는
수학여행 고등학생 우리얘기 들어다오
진상조사 수사착수 이런 재판 저런 발표
그 누구가 울었으며 그 누구가 분노했나
대명천지 밝은 세상 과학입국 무역대국
인권보호 국민보호 말만 좋다 높은 자리
원통해라 이팔 청춘 꽃같은 이 세상을
살아보지 못하고선 차디 차라 바다 속을
떠도는 이 내 몸 너가 아랴 누가 아랴...(이하 생략)
비극적인 대재난인 세월호 이야기를 가사로 만들면 위의 글 비슷한 것도 만들어 질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BTS의 Permission to Dance 라는 노래의 시작 부분을 가사로 옮긴다면;
영어 원 가사(歌詞)는 아래와 같고 ;
It's the thought of being young
When your heart's just like a drum
Beating louder with no way to guard it
When it all seems like it's wrong
Just sing along to Elton John(이하 생략)
이것을 가사 형식으로 옮긴다면
어화 벗님네야 이 내 말씀 들어보소
청춘이라 생각하면 심장 고동 북을 둥둥
크게 크게 소리내면 보전할 길 그지 없네
잘못된다 한탄 말고 엘톤존을 따라하소
(이하 생략)
비슷하게 되겠지요.
세월호 이야기는 어색하지 않은 듯 보이는데 BTS는 몹시 어색해 보입니다. 한편 세월호 이야기는 저 이야기를 끝맺으려면 얼마나 긴 지면이 더 필요할지 가늠이 잘 안 되고 BTS의 경우는 그들의 현란한 노래와 춤과 위의 글 형식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정극인의 상춘곡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가사문학의 쇠퇴 과정에 대하여 연구하고 어떤 의미있는 결론을 얻는 작업은 후배들에게 미루어 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