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피냄새 나는 복직탄원서
송강 정철 사미인곡 -
학살의 프롤로그, 피냄새 나는 복직탄원서
1.
송강 정철(1536~1594)이 쓴 사미인곡(1585년~1589년에 쓴 것으로 추정)을 읽어보면 우선 그 아름답고 절절한 표현에 놀라게 됩니다. 다음으로 작자의 생애를 찬찬히 들여다보게 되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철의 생애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선조 임금과 정철의 관계를 몇 가지 짚어본 후에는 정철의 일생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묻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사미인곡으로 돌아오면 이 글이 조금더 잘 보입니다.
사미인곡을 읽기 전에 우선 다른 시를 먼저 읽어 봅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로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원문 부기 생략합니다)
홍랑이라는 함경도 경성지방의 기생이 선조 6년에 고죽 최경창이라는 관리에게 보낸 글입니다. 실제로 묏버들도 보냈답니다. 사미인곡과 비슷한 시기에 쓰여졌습니다. 둘다 여성 話者입니다.
윗 시조에서는 화자의 당당함이 읽힙니다. 산에서 무수히 자라는 버들의 가지를 꺾어 보내며, 창 밖에 심어두었다가 새잎 나거든 나 본 듯 하라고 하지요. 자신을 봄에 새로 피어나는 잎이라고 생각하는 자부심이 가득합니다. 오래 전에 유행했던 “잘 자~ 내 꿈 꿔~” 같습니다.
이런 예비지식을 가지고 아래 사미인곡을 읽어보시면 재미있습니다. 여성 화자의 당당함이 사미인곡에서도 느껴지시나요?
(1. 고어 원문은 별도로 이 글의 끝에 첨부하였습니다. 필자는 은사이신 시인 김원호 선생님의 “고전시가 분석노트” (디딤돌)를 참고하였습니다. 선생님의 고마움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 현대문 번역은 좀 미흡하지만 제 손으로 했습니다. 원문의 정서와 어휘를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습니다.
3. 서두에 적은 몇 가지 화두들은 이 글을 통하여 천천히 정리해 보겠습니다.)
2.
사미인곡(현대문 번역)
번역 ; 허독
이 몸 생길 제에 님을 좇아 생겨나니
한평생 인연이 하늘도 모를 일이던가
나의 젊음, 님의 사랑
이 마음 이 사랑 견줄 곳 다시 없네
평생 원하기를 함께 가자 하였더니
늙어서 무슨 일로 외로이 두고 그리운가
엊그제 님 뫼시고 광한전에 올랐더니
그 동안 어인 일로 인간 세상 내려오니
올 적에 빗은 머리 헝클어져 삼 년이라
연지분 있네마는 누굴 위해 간직할까
마음에 맺힌 설움 첩첩히 쌓여 있어
짓나니 한숨이요 지나니 눈물이라
인생은 끝 있거늘 시름은 끝이 없네
무심한 세월은 물 흐르듯 하는 중에
뜨겁고 추운 것이 때 맞추어 가고 오니
듣거니 보거니 흐느낄 일도 많고 많네.
동풍 문득 불어 쌓인 눈 헤쳐내니
창 밖 심은 매화 두세 가지 피었어라
차갑고 답답한 중 낮은 향기 무슨 일
해는 지고 달 떠서 베갯머리 비추이니
흐느끼는듯 반기는듯 님이신가 아니신가
저 매화 꺾어내어 님 계신 곳 보내고져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까
꽃 지고 새 잎 나니 녹음이 깔렸는데
비단 휘장 적막하고 수놓은 장막 비어있네
부용 방장 걷어두고 공작 병풍 둘러치니
가뜩이나 많은 시름 날은 어찌 길었던가
원앙 비단 베어 놓고 오색실 풀어내어
금자로 겨누어서 님의 옷 지어내니
솜씨도 있거니와 규격도 갖추었네
산호 지게 위 백옥함에 담아두고
님에게 보내려고 님 계신데 바라보니
산인가 구름인가 험하디 험하도다.
천리 길 만리 길을 누가 있어 찾아가며
가거든 열어두고 나를 본 듯 반기실까
하룻밤 서리에 기러기 울며 갈 때
높은 누각 혼자 올라 수정 발을 걷어보니
동산에 달이 나고 북극 별 보이도다
님인가 반기니 눈물이 절로 나네
맑은 달빛 쥐어내어 봉황루에 부치고저
누 위에 걸어두고 온 세상 다 비추어
깊은 산 험한 골짝 대낮같이 만드소서
하늘 땅 모두 막혀 흰눈만 비치일 때
사람은커녕 나는 새도 그쳤구나
소상 남쪽 언덕 이렇듯 추울진대
옥루 높은 곳 더욱 일러 무엇하리
햇볕을 부채 부쳐 임 계신 데 쏘이고저
초가 처마 비친 해를 옥루에 올리고저
붉은치마 여며 입고 푸른 소매 반만 걷네.
기운 해 키큰 대나무 여러 생각 많고 많아
짧은 해 쉽게 넘어 긴 밤을 꼿꼿 앉아
푸른 등 걸어두고 전공후 놓아두네
꿈에나 님을 보려 턱 괴고 기대앉자
원앙이불 차기도 차다 이 밤은 언제 새나
하루는 열두 때 한 달은 서른 날
잠시나마 생각말자 이 시름 잊자한들
마음에 맺혀있어 골수에 사무치니
편작이 열 명 온들 이 병을 어찌하리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탓이로다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리로다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다
님이야 나인줄 모르셔도 나는 님 좇으려 하노라
송강 정철이 쓴 사미인곡을 위하여 같은 시대에 홍랑이라는 기생이 쓴 시조 ‘묏버들 가려꺾어~’를 이 글의 도입부에서 잠깐 보았습니다. 홍랑이 쓴 이 시조와 정철이 쓴 사미인곡은 매우 대조적입니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님에게로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잎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산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묏버들을 꺾어서 보내니 창 밖에 심어두었다가 봄에 새잎 나오면 그 연두색 이쁜 모습을 보고 함경도에 있는 이 홍랑을 생각해 달라’ 혹은 ‘생각 안 날 리가 없을 것이다.’ 이렇게 해석됩니다. 여자로서의 당당함이 물씬 느껴집니다.
그러나 사미인곡은 다릅니다.
이 글의 탁월한 점은 구조를 잘 만들어 두고 시작했다는 데에 있지요. ‘이 몸 삼기실제’로 시작하는 서사, 그 뒤 ‘동풍이 건 듯 부러~’에서 시작하여 ‘이 밤은 언제 샐고’로 끝나는 본사(本詞). 본사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에 화자가 한 일, 느낀 일을 적어 둡니다. 그리고 ‘하루도 열 두 때’하면서 마치는 단락이 나오지요. 결사(結詞)라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미인곡의 화자는 사랑하는 임에게 무엇인가를 보냅니다. 자세히 볼까요? 봄에는 갓 핀 매화를 보내는군요. ‘저 매화 꺾어내어 님 계신 곳 보내고져’ 라고 하면서. 여름에는 비단 옷을 만들어서 보내는데 (‘원앙비단, 오색실, 님의 옷을 지어내니’) 그냥 보자기에 싸서 보내는 것이 아니라 백옥으로 만든 함에 담고 그 함을 산호로 만든 지게 위에 얹어 보냅니다. 옷값보다 함값, 지게값이 훨씬 비쌀 것이 분명합니다. 매우 호사스럽습니다. 가을에는 달빛을 보내는군요. (‘맑은 달빛 피어내어 봉황루에 부치고저’) 겨울에는 날씨가 추우므로 따뜻한 햇볕을 보내려고 합니다.(햇볕을 부쳐내어 임 계신데 쏘이고저‘)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낸 여자는 사미인곡 속의 여자에게 비하면 그냥 아무 정성도 쏟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미인곡의 화자는 보내고도 불안해 합니다. 여기에 이 글의 비밀이 있습니다. 봄에 보내는 매화에게 ‘님이 너를 보고 어떻다 여기실가?’ 하면서 불안해하고, 여름에 보내는 비단옷 들어있는 백옥함을 두고는 ‘가거든 열어두고 나를 본 듯 반기실까?’하고 의문을 품지요. 함을 열기나 할런지도 모르겠다는 위축된 마음입니다.
가을에 보내는 달빛은 좀 정치적입니다. 받는 사람을 위하여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이 부분은 다음 기회에... 겨울에 보내려고 한 햇볕은 보내는 동작이 없고 옷소매 걷고 햇볕을 모으는 동작만 하다가 마는군요. 이렇게 분석하면 사미인곡의 화자는 자기의 마음을 표현하여 물건을 보내지만 님이 이것들을 반길지 자신이 통 없습니다 그나마 가을에는 자기의 뜻을 대신 님이 펼쳐달라는 것으로 읽히고 겨울에는 그것도 못한채 추울 테니 햇볕을 보내고 싶다는 생각으로 그치지요. 흔들리고 불안해 하는 마음이 그대로 읽혀집니다.
이 글은 송강 정철이 선조 임금에게 보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송강 정철과 선조와의 관계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코 대등하지 않은 관계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 시대의 임금, 신하 관계가 모두 이랬을까요? 아니면 정철에게 다른 목적이 있었을까요? 혹은 선조가 정철을 대하는 태도가 늘 엄중했을까요?
값비싼 백옥함이 싱싱한 묏버들 앞에서 어쩐지 초라해 보입니다.
3.
사미인곡은 분명히 우리말로 된 시가 중에서 높게 평가 되어야 할 작품입니다. 사미인곡이 만들어졌다고 하는 1588년은 한글이 반포된 1446년부터 불과 140년 정도 지난 시기입니다. 새로운 표기 방법이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한문을 주로 글쓰기의 방법으로 배우고 익힌 사람이 구어체의 시가를 운율 정확하게 맞추어 썼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사미인곡에 주로 쓰인 기법은 대조법입니다. 높낮이를 설정해 둔 것은, 임금 읽으라고 신하가 쓴 글이기 때문일 겁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대조되는 이미지가 쉬지 않고 튀어 나옵니다. 전체를 다 찾아 낼 수는 없고 몇 가지만 예를 들면;
광한전 - 하계, 인생 유한 - 무심 세월, 염-량, 동풍 - 적설, 냉담-암향, 봉황루-심산궁곡, 소상남반- 옥루고처... 몇 개 더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사미인곡의 마지막 대목과 같은 표현을 미당 서정주의 시에서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사라져서 범나비 되리로다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족족 앉았다가
향 묻은 날개로 님의 옷에 옮으리다
님이야 나인줄 모르셔도 나는 님 좇으려 하노라
(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애로 님의 오 올므리라.
님이야 날인 줄 모셔도 내 님 조려 노라. )
정철의 사미인곡 마지막 부분입니다. 차라리 죽어서라도 범나비가 되어서 님의 옷에 앉겠다. 님이 나인줄 알든 모르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한편, 미당 서정주는 “춘향유문” 마지막 부분에서
저승이 어딘지는 똑똑히 모르지만
춘향의 사랑보단 오히려 더 먼
딴 나라는 아마 아닐 것입니다
천길 땅밑을 검은 물로 흐르거나
도솔천의 하늘을 구름으로 날드래도
그건 결국 도련님 곁 아니예요?
더구나 그 구름이 쏘내기되야 퍼부을 때
춘향은 틀림없이 거기 있을 거예요!
라고 하여 춘향은 곧 죽겠지만 검은 물로 흐르든, 구름이 되든, 이도령 곁을 지킬 것이며, 더구나 소나기가 되어 이 도령에게 쏟아질 때에는 자신인 줄 모를 수 없을 거라고 합니다.
죽음, 환생, 다른 존재로 변함, 능동적인 여성, 수동적인 남성, 이런 것들은 똑 같습니다. 다만, 춘향이 사미인곡의 화자보다 더 능동적이고 기운차고 당당합니다. 나비가 옷에 가볍게 앉는 것 보다 님의 머리 위로 퍼붓는 소나기가 훨씬 정열적이지요.
송강 정철과 미당 서정주, 두 사람 모두 뛰어난 시인입니다. 누가 누구의 작품에 영향 받았다고 생각하기 힘듭니다. 두 사람의 영감이 같은 곳에 도달했다고 할 수 밖에 없습니다.
4.
사미인곡은 송강 정철이 선조 임금에게 바치는 글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 사람이 당대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후대 사람들의 평가는 왜 보지 않느냐고요? 시간이 지나면서 송강 정철의 행적이 송시열등 서인으로부터 찬양을 받은 결과 (당연하지요 반대파인 동인을 몰살시켰으니) 급기야는 작품 수준이 조선 제일이라는 등으로 도그마화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정치적 바람을 탔기 때문입니다. 선조는 여일합니다. 좋은 평가하고 있는 사관이나 역사학자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정철이 죽고 난 뒤에 당시 역사 기록을 맡은 사관들이 ‘이런 인물은 한 마디 하고 넘어가야 된다’고 결심하고 그의 생애를 간단히 요약하여 말합니다. 당시에는 역사 기록하는 공무원인 사관에게 이 정도의 절대 권력이 있었다고 합니다. 놀랍습니다.
...........................
선조실록 46권, 선조 26년 12월 21일 경오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인성 부원군 정철의 졸기
인성 부원군(寅城府院君) 정철(鄭澈)이 졸(卒)하였다. 【철은 논박을 받고 강화(江華)에 가 있다가 졸하였다. 】
사신은 논한다.
정철은 성품이 편협하고 말이 망령되고 행동이 경망하고 농담과 해학을 좋아했기 때문에 원망을 자초(自招)하였다. 최영경(崔永慶)이 옥에 갇혀 있을 적에, 그가 영경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은 나라 사람이 다같이 아는 바이고 그가 이미 국권을 잡고 있었으므로 법을 집행하는 사람들도 모두 정철과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 그런데 마침내 죽게 만들었으니 가수(假手)했다는 말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게다가 일에 대응하는 재간도 모자라 처사(處事)가 소루하였기 때문에 양호(兩湖)의 체찰사(體察使)로 있을 때에는 인심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고,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는 전대(專對)에 잘못을 저지르는 등 죄려(罪戾)가 잇따랐으므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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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 별로 없습니다. 성품은 가볍고 경망했답니다. 당시 진중한 군자가 높이 평가받던 시대에 거의 욕에 가까운 평가입니다. 친구인 최영경을 죽인 일이 잘못 되었다고 단언합니다. 지방 수령으로 나가서도 별 볼 일 없었고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는 죄를 지었다고 했습니다. 임진란 초기에 명나라에 가서 “왜군들 다 물러갔습니다.” 라고 말했지요. 명나라와 조선이 발칵 뒤집힙니다. 줄이고. 결론적으로 죽을 때까지 비방이 그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미인곡 등 뛰어난 가사 문학 작품을 썼다.’ 이런 말은 없습니다. 하기야 당시는 한글로 쓴 글은 문학의 범주에 속하지도 않았지요.
다음은 선조에 대한 평가를 보겠습니다.
선조가 즉위한 지 26년, 1593년 9월 즉 임진란 일어난 지 1년 약 5개월 뒤 선조는 ‘못해 먹겠다. 이제부터 왕 그만하겠다’하고 선언합니다. 깜짝 놀란 대신들이 만류하지요. 사실 자기의 권력 장악력을 높이기 위하여하는 흔한 제스추어이지요. 선조는 재임 중 여러 번 이런 “사표 쑈”를 합니다. 그런데 이 일을 두고 사관은 아래와 같이 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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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2권, 선조 26년 9월 7일 무오 5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정원이 선위하지 말기를 청하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삼가 성상의 비답을 보건대, 전지(傳旨)를 즉시 봉행하지 아니하여 의리를 크게 어겼다고 꾸짖으셨는데, 신들은 서로 돌아보고 민망스러워하며 말할 바를 몰랐습니다. 신들은 외람되이 성상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국세가 위태롭게 되어 그 위험이 날로 임박해지고 있음을 목격하고 있는데, 성상께서는 위에 계시면서 분발하여 왜적을 쳐 회복을 도모할 생각은 않고 오직 겸허한 마음으로 물러날 생각만을 가지고 큰 계책을 그르치고자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명을 거역하는 데 대한 벌도 피하지 않으면서 아뢰는 이유입니다.
삼가 오늘의 사세(事勢)를 살펴보건대, 왜적은 해안(海岸)에 주둔해 있으면서 아직도 물러갈 기약이 없으며, 백성의 시체는 구렁을 메우고 있는데도 구제할 대책이 없으며, 심지어는 원릉(園陵)이 치욕을 당하고 종사(宗社)가 화를 입기까지 한 것은 보기에 놀랍고 가슴이 두근거려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하늘에 계신 조종께서 전하에게 기대하는 바가 어떠하겠으며 백만의 생령들이 전하에게 바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지금은 바로 전하께서 창을 베고 잠을 자며 쓸개를 맛보아야 할 때이지 진실로 임금의 자리를 내놓고 한가롭게 물러날 시기가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속히 시행하라는 하교를 여러 번 내리시어 위아래가 서로 버틴 지가 이미 열흘 가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의 심정이 민망 절박하게 여기고 있고 모든 기상(氣象)이 참담한 시름 속에 있으니 이는 민심을 진정시키고 화합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깊이 더 생각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그대로 있으면 국사를 다시 그르치게 될 것이고 물러나게 되면 시사(時事)를 잘 처리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구차스럽게 그대로 있으면서 스스로 처신을 잘못하게 되면 수욕(羞辱)만 남길 것인데 국가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다시 말하지 말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2백 년 조종(祖宗)의 기업(基業)을 당저(當宁)452) 에 이르러서 남김없이 다 멸망시켜 놓고 겸퇴(謙退)하면서 다시는 백성의 윗자리에 군림하지 않고자 하여 하루아침에 병을 이유로 총명하고 인효(仁孝)한 후사(後嗣)에게 대위(大位)를 물려주려고 하니, 그 심정은 진실로 서글프나 그 뜻은 매우 아름다운 것이다. 진실로 현명한 판단이 아니었으면 어떻게 이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겠는가. 대신(大臣)으로서는 눈물을 흘리며 봉행하더라도 잘못됨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백관을 인솔하고 끈질기게 설득하고 극력 간쟁하여 반드시 승락을 받고서야 그만두려 하는가. 왜적이 물러가기 전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왜적이 물러가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왜적이 물러간 다음에 그 일을 시행하려 하면 우선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간쟁하고, 환도한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중국의 조사(詔使)가 공관(公館)에 있으므로 할 수가 없다고 하고, 조사가 돌아간 다음에 그 일을 하려 하면 세자[儲宮]가 어려서 할 수 없다고 하면서, 세월을 끌며 말을 바꿔 임금과 신하 사이에 마치 어린아이가 서로 희롱하는 것처럼 하였으니 이것이 도대체 무슨 사리(事理)인가. 당시에 세자의 나이가 이미 약관(弱冠)이었고 학문도 고명(高明)하였으며 덕망도 이미 성숙하였으니 대위(大位)를 이어받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난을 평정하고 화를 종식시켰을 것인데, 계속 어린 세자[沖嗣]라고 하였다. 옛부터 약관의 어린 세자가 언제 있었던가. 끊임없이 간쟁하여 상의 훌륭했던 생각을 중지시켰으니 매우 애석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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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부는 대신들이 임금에게 한 말입니다. 우리가 당신 말을 안 들을려고 그랬던 이유는 지금 왜군이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이것을 토벌할 생각은 하지 않고 물러난다고만 하고 있으니 우리가 어찌 당신 말을 듣겠는가? 이제 그런 말 그만하고 본연의 업무, 즉 군사 지휘에 복귀해 달라“ 이 말을 듣고 선조는 짐짓 한 발 뒤로 뺍니다. ‘임금 자리에 있으면 더 부끄러워질까봐 그랬다. 더 말하지마라.’고 합니다. 사태가 수습된 것이지요.
이 장면을 기록하는 사관은 매우 기분 나쁩니다.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2백년 사직을 다 망쳐먹은 왕이 그만둔다고 하면 못 이기는 체 받아들여서 임금을 갈아치워야지 뭘 쓸데없이 말리고 그랬는지 이해가 안감. 오랜만에 임금이 그만 둔다는 훌륭한 생각을 했는데 좌절시켰으니 애석하다.”
정철은 정철대로 선조는 선조대로, 적어도 그 시대의 문제를 풀기에 골몰했던 지도자는 아니었다라고 말하면 가장 부드러운 표현이 될 듯 합니다.
5.
영국 사람 조지 오웰은 ‘모든 글쓰기는 정치적 글쓰기’라고 하였습니다.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역시 정치적 글쓰기입니다. 그의 이력을 보면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정철은 1536년 생입니다. 그 집안 딸들이 예뻤던 모양입니다. 큰누나는 선조의 윗,윗 대 임금 인종의 후궁으로 뽑혀가서 귀인이라는 벼슬을 받습니다. 그 덕분에 어린 정철은 누나 보러 간다고 궁궐에 자주 놀러가서 나중에 명종이 되는 세자와 소싯적 친구로 잘 놀았답니다. 둘째 누나는 왕족 이유라는 사람의 부인이 되었습니다. 조선 시대 금수저, 세도가, 엘리트입니다. 1562년, 26세 때에는 장원급제 합니다. 명종이 보고 받고 매우 좋아했답니다. 그 뒤부터는 좋은 자리만 다녔습니다. 강원도 관찰사도 하고 승승장구 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색 당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철은 서인 편에 속했습니다. 1584년 48세 되던 해에 동인들이 정철을 당쟁의 중심이라며 집중 공격하고 1585년 사직합니다. 한창 경력의 정점에 있을 때 반대 세력의 공격을 받아 좌절된 것입니다. 이 때 임금을 향해서 쓴 글이 ‘사미인곡’, ‘속미인곡’입니다. 선조 임금이 이 글을 읽어 보았을까요? 이후 1589년 정여립의 난이 일어났을 때 정철이 발탁되어 전라도 담양에서 서울로 돌아온후 정여립 사건 수사책임자가 되는 것을 보면 선조가 이 글을 읽어 보았다고 생각됩니다.
이후 이 사건으로 동인 천여 명이 죽거나, 유배가거나 다칩니다. 이제 동인은 없어졌습니다. 서인들이 노론, 소론으로 분열됩니다. 나라의 인재 천여 명이 사라지고 난 뒤 조선은 전쟁을 만납니다. 1592년 임진왜란입니다. 참혹한 역사입니다.
사미인곡, 속미인곡은은 그래서 ‘학살의 프롤로그, 피냄새 나는 복직탄원서’입니다.
(사미인곡, 모두 끝)
(사족 1.)
[ 정철을위하여, ‘당쟁이 시작되는 시대의 엘리트가 겪었던 불운’ 정도로 미화할 생각 없습니다.
같은 시대에 율곡 이이, 오성 이항복, 한음 이덕형, 서애 유성룡 등 자기 일을 훌륭히 해내면서 나라를 구한 영웅들이 조정에 있었고, 무엇보다 바다 위에서 민족을 구원한 이순신 장군도 같은 시대 사람입니다. 율곡은 정철의 조금 선배 되는데 정철에게 술 그만 먹고 말수도 조금 줄이라고 자주 간곡하게 충고하였다고 합니다.
사색당쟁의 끝판왕, 서인의 영원한 지도자 우암 송시열은 동인을 박멸한 정철의 공을 기려서 1665년 ‘송강사‘라는 사당도 지어 줍니다. 이 사당은 지금 충북 진천 어디에 큰 비석과 함께 잘 보전되어 있습니다. ]
(사족 2.)
고어 원문입니다.(잘 구현될지 모르겠습니다.)
이 몸 삼기실 제 님을 조차 삼기시니,
緣分연분이며 하 모 일이런가
나 나 졈어 잇고 님 나 날 괴시니,
이 음 이 랑 견졸 노여 없다.
平평生애 願원하요 녜쟈 얏더니,
늙거야 므 일로 외오 두고 글이 고 .
엇그제 님을 뫼셔 廣寒殿광한뎐의 올낫더니,
그 더 엇디하ᆞ야 下界하계예 려오니,
올 적의 비슨 머리 얼킈연디 三年삼년이라.
臙脂粉연지분 잇마 눌 위하ᆞ야 고이 고
음의 친 실음 疊疊텹텹이 혀 이셔,
짓니 한숨이오 디나ᆞ니 눈믈이라.
人生인은 有限유하ᆞ간 시도 그지업다
無心무심 歲月셰월은 믈 흐 고야 .
炎涼염량이 아라 가 고텨 오니,
듯거니 보거니 늣길 일도 하도 할샤.
東風동풍이 건듯 부러 積雪젹셜을 헤텨내니,
窓창 밧긔 심근 梅花매화 두세 가지 픠여셰라.
득 冷淡냉담 暗香암향은 므일고.
黃昏황혼의 이 조차 벼마 빗최니 ,
늣기 반기 님이신가 아니신가.
뎌 梅花매화 것거 내여 님 겨신 보내오져.
님이 너 보고 엇더타 너기실고.
디고 새닙 나니 綠陰녹음이 렷 ,
羅幃나위 寂寞젹막고 繡幕슈막이 뷔여 잇다.
芙蓉부용을 거더 노코 孔雀공쟉을 둘러 두니,
득 시 한 날은 엇디 기돗던고.
鴛鴦錦원앙금 버혀노코 五色線오색션 플텨 내여,
금자 견화이셔 님의 옷 지어 내니,
手品슈품은 니와 制度졔도도 시고.
珊瑚樹산호슈 지게 우 白玉函백옥함의 다마 두고,
님의게 보내오려 님 겨신 라보니,
山산인가 구롬인가 머흐도 머흘시고.
千里천리 萬里만리 길흘 뉘라셔 자갈고.
니거든 여러 두고 날인가 반기실가.
밤 서리김의 기러기 우러 녤 제,
危樓위루에 혼자 올나 水晶簾슈정념을 거든 말이,
東동山산의 이 나고 北極북극의 별이 뵈니
님이신가 반기니 눈믈이 절로 난다.
淸光청광을 쥐여 내여 鳳凰樓봉황누의 븟티고져.
樓누 우 거러 두고 八荒팔황의 다 비최여,
深山窮谷심산궁곡 졈낫티 그쇼셔.
乾坤건곤이 閉塞폐야 白雪백설이 비친 제,
사은 니와 새도 긋쳐 잇다.
瀟湘南畔쇼샹남반도 치오미 이러커든,
玉樓高處옥누고쳐야 더옥 닐러 므리.
陽春양츈을 부쳐내여 님 겨신 쏘이고져.
茅 簷모 쳠 비쵠 玉 樓옥 누의 올리고져.
紅裳홍샹을 니믜고 翠袖슈 半반만 거더
日暮脩竹일모슈듁의 헴가림도 하도 할샤.
댜 수이 디여 긴 밤을 고초 안자,
靑燈청등 거른 겻 鈿箜뎐공후 노하 두고,
의나 님을 보려 밧고 비겨시니,
鴦衾앙금도 도 샤 이 밤은 언제 샐고.
도 열두 도 셜흔 날,
져근덧 각 마라 이 시 닛쟈 니,
의 쳐 이셔 骨髓골슈의 텨시니,
扁鵲편쟉이 열히 오나 이 병을 엇디 리 .
어와 내 병이야 이 님의 타시로사,
하리 싀어디여 범나븨 되오리라.
곳나모 가지마다 간다ᆞl 죡죡 안니다가,
향 므든 애로 님의 오 올므리라 .
님이야 날인 줄 모셔도 내 님 조려 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