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윤선도의 어부사시사 -- 본 대로 느낀 대로 시쓰기,
말로 세상을 표현하는 일. 자기가 방금 보고 느낀 그것을 언어로 바꾸어서 전달하는 일. 그 도구 중 하나에 시가 있다. 윤선도는 1650년 경 어부사시사 즉 ‘어부의 네 계절을 읊은 시’라는 제목으로 자기가 본 바다와 배 그리고 고기잡이하러 나간 자기를 나타내려 한다. 그러나 이 고기잡이는 생업이 아니다. 바다라는 자연, 고기 잡는 배라는 장치를 이용하여 자기를 나타내는 수단이다. 무슨 자아? 풍경 속에 용해되어 있는 자아를 표현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한 표현의 도구는 물론 언어이다. 언어는 말로 주고받되 글로 쓰여져야 고정된다. 언어가 일단 종이에 고정되면 사물이 굳는다. 바다는 더 이상 파도치지 않고, 배는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하는 말은 간신히 기억해서 적어 두었으나 그 때 들었던 사공의 소리와 노가 물을 가르면서 내던 끼익, 찌그덕 하던 소리는 담을 수는 없다. 그 뿐이랴 배 위에서 맞던 비, 머리 위로 떨어지던 그 물방울의 감촉, 이런 모든 것을 흰 종이 위에 점점이 흩어진 글자들은 되살려 주지 못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약 사백 년 전의 윤선도는 이런 모든 것들을 종이 위에 펼쳐 놓는다. 전문을 옮기면 이렇다. (고문을 되도록 살리되, 현대문으로 번역했다. 한자는 그대로 노출 시켰다. 자료로는 고전국어정해. 장덕순, 강윤호 , 관동출판사, 1980년을 사용했다. 계절마다 열 수씩 있으나 장덕순 선생의 책에 한 수 씩 발췌해 두어 이를 따랐다.)
漁父四時詞
春
東風이 건듯 부니 물결이 고이 인다.
돛 달아라 돛 달아라
東湖를 돌아보며 西湖로 가자스라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총에서 나무 목 변 제외, 이하 동일)
앞산은 지나가고 뒷산이 나아 온다.
夏
연잎에 밥 싸두고 반찬을랑 장만 마라
닻 들어라 닻 들어라
靑篛笠은 써 있노라 綠簑衣 가져오냐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
無心한 白鷗는 내 좇는가 제 좇는가
秋
水國에 가을이 드니 고기마다 살쪄있다
닻 들어라 닻 들어라
萬頃澄波에 실컷 容與하자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
人間을 돌아보니 멀수록 더욱 좋다
冬
간밤에 눈 갠 후에 景物이 달라졌다
이어라 이어라
앞에는 萬頃琉璃 뒤에는 千疊玉山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
仙界ㄴ가 佛界ㄴ가 人間이 아니로다
우선 겨울 부분 맨 마지막 행을 다시 읽자. “선계인가 불계인가? 인간 세상이 아니로구나.” 즉 윤선도는 이 시를 쓸 때 자기 자신의 필력으로는 묘사해 낼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세상에 사는 시인은 인간 세상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므로 신선 세계나 부처의 세계를 인간 세상의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언어가 막혀 더 나아가지 못하는 그곳, 그 순간에 윤선도가 서 있는 것이다. 이 지점까지 갔다는 점에 윤선도의 탁월함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 종이를 찢고 먹을 쏟아 버리나? 그럴 수 없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본 대로 느낀 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더 정확하게 말해서 저 중국인들이 쓰는 글자보다 더 입에 달라붙는 우리 고유한 말로 표현코자 하는 것이다.
동풍이 건 듯 부니~ 하면서 글 짓는 자신이 말하기 시작하면 배는 떠나간다. 배를 부리는 사공들은 서로 배를 움직이는 지시를 주고받는다. ‘돛을 달아라’라고 하면서. 그래서 독자는 어느새 윤선도의 배에 동승하게 된다. 이 장면을 이해하기 위해서 비틀즈의 ‘Yellow Submarine’이라는 노래를 들어보자. 초반에 “bosun, bosun”하는 소리가 노래의 배경으로 깔린다. bosun은 갑판장이라는 뜻이다. 누군가 갑판장을 부르는 소리를 노래의 배경으로 넣은 것이다. 윤선도와 비틀즈가 같은 생각을 하였다. 배는 움직이고 이제는 노가 찌걱 찌걱 앞 뒤로 물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그런데 이것은 사공들의 말이 아니다. 그냥 사물이 내는 소리이다. 그래서 달리 표현하고 싶다. ‘찌그덕 찌그덕 어쌰’라는 소리를. ‘돛 달아라’ 라는 사람의 말은 한글로 썼으니 至菊棇 至菊棇 於思臥 하고 한자로 적는다. 이렇게 구별해 낸다.
시조를 이렇게 입체적으로 쓴 사람이 윤선도 이전에 있었던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시에 이렇게 말 아닌 것들을 비벼 넣을 줄 아는 시인이 그 뒤에 생겨났을까? 글쎄, 어디서 본 듯 하긴 하다. (김 아무개라는 시인이 문학과 지성사에서 펴낸 시집 ‘시인의 바깥에서’에 보면 ‘강가의 풀숲에 우리가 누워’라는 이상한 시가 있는데 시를 중층적 입체적으로 썼다는 점에서 비슷한 듯도 하다. 이 사람의 시는 시에 각주를 붙인 ‘각주시’이다. 궁금한 사람은 찾아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