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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어져 내일이야 –
빈 방에서 한숨 쉬기.

by 허독

황진이. 어져 내일이야 – 빈 방에서 한숨 쉬기.






어져,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로도냐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퇴야

보내고 그리난 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황진이)




황진이의 유명한 시조 중 하나입니다. 윗 글에서는 아래 아 표기 등 고어 원문의 표기를 살리지 못하였습니다.(맥으로 한글 고어를 구현하는 날을 기다립니다.)


현대문으로 번역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아 나의 일이여 그리울 줄 몰랐더냐

있어랴 하였다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情은 나도 몰라 하노라



이 시의 충격은 도치에 있습니다. 문장이 어법에 맞게 순서대로 발화되지 않고 먼저 생각나는대로 말하여졌다는 데에 이 시의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황진이는 “내가 있으라고 하였다면 그가 구태여 갔겠느냐마는”이라고 하지 않고 “이시라 하더면 가랴마난 제 구퇴야”라고 말을 섞은 것일까요?“ 마음이 말이 되어 나오는 과정이 그러하였기 때문입니다. 탄식이 말이 아니고 울음이 말이 아니듯이, 여기서 황진이가 촛불 켜 놓고 종이에 언문으로 적어 내려간 이 글자는, 거꾸로, 언어가 아니고 황진이의 한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황진이의 방으로 들어가서 그녀가 한숨 쉬는 것을 방구석에서 듣고 있는 중입니다. 황진이는 이 글을 쓴 다음 노비나 하인을 통해서 그 대상인 사람에게 이 글을 보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혼자서 한숨 쉰 것을 누구에게 보내겠습니까? 비슷한 사람으로 김시습이 있습니다. 소문난 신동이었으나 수양대군이 왕이 되는 것을 본 뒤로 벼슬을 안 하고 산으로만 떠돌았지요. 개울물 가에서 시를 쓴 다음 물 속으로 던졌다고 합니다. 글씨가 물에 풀어져서 흘러 내려갔겠지요. 누구에게 보이려고 쓴 글이 아니란 것입니다.


시와 산문의 기본적인 구별이 여기에 있습니다. 한숨 쉬듯 쓰는 시, 울다가 말다가 하면서 내뱉는 말, 이런 것들이 시입니다. 그래서 누구든 시인입니다. 울 때에 울 수만 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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