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레바퀴 아래서>를 읽고,

by 노정희


​<데미안>,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이어 헤세가 20대에 썼다는 <수레바퀴 아래서>를 읽었다. 내리 세 작품을 접하고 나니, 내 머릿속에 헤세라는 작가의 형상이 주관적으로나마 뚜렷이 그려지는 기분이다. 나에게 그는 자기 연민에 빠진 유약한 영혼이자, 천재적이지만 지나치게 예민하여 세상 모든 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징징이'로 느껴진다.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이 소설은 크게 세 덩어리의 사건으로 전개된다.

초반부는 놀라울 정도로 우리네 삶과 닮아 있다. 100년 전 독일에서도 좋은 상급 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밤늦도록 선행 학습을 했다는 점, 그리고 한스의 천재성을 북돋기 위해 학교와 아버지가 혈안이 되어 몰아붙이는 장면은 마치 오늘날 대치동의 학구열 높은 학원가를 보는 듯했다.

"10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 사는 게 거기서 거기인가?" 싶어 절로 혀가 차졌다.


​중반부, 엄격한 신학교 생활 중 만난 하일너는 한스의 멘탈을 뒤흔든다. 하일너는 훗날 <데미안>의 원형이 되었을 캐릭터로 보이는데, 기존 질서에 반항하며 또래보다 어른스러운 척하면 은근히 그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자유분방한 인물이다. 그와의 동성애적 접촉(가벼운 입맞춤)으로 한스는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고, 끝내 학교 시스템에 적응하지 못한 채 낙오하고 만다.


​후반부, 생애 첫 실패를 맛본 한스는 고향으로 돌아오지만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다. 은근히 깔보던 육체노동의 세계에 발을 들이며 자신이 그곳에서도 열등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고, 붕 뜬 마음을 다잡지 못한 채 표류한다. 결국 그는 찬란한 자연의 생명력을 탐미하다가 실족사인지 자살인지 모를 모호한 결말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한스(혹은 헤세)는 산업화 사회나 육체노동의 가치가 지배하는 농경 사회에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기질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중세 귀족으로 태어났다면? 아니면 AI가 인간의 노동을 모두 대체한 미래 사회에 태어났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상상을 해본다.

자연의 아름다움만이 그의 예민한 감각을 충족시킬 뿐, 냉혹한 생존의 현장은 그에게 가혹하기만 하다. 무언가 성취하기 위해 끊임없이 에너지를 쏟아야 하는 세상에서, 그의 유약한 기질은 삶을 지탱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였다.


​특히 대한민국의 비정한 교육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아침부터 트렁크에 문제집을 가득 싣고 학원가를 전전하는 아이들의 고통에 비해 한스의 고민은 오히려 '한가롭다'는 느낌마저 든다. 이런 내 시선이 너무 비정한가 싶어 스스로 깜짝 놀랄 정도다.

​거장의 작품을 한낱 '동네 아줌마'의 시선으로 치열하게 비판하려니 못내 부담스럽기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그의 말랑 말랑한 문학을 읽기에는 너무 현실의 때가 너무 많이 타버린 것일까?

아니면 멘탈 약한 소설 속 인물을 보며 멘탈 약한 아줌마가 보면서 한가롭게 쯧쯧 거린 거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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