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IMF 시절, 허준호(중소기업 사장)는 회사 부도를 막기 위해 헐값으로 살던 아파트를 판다.
그 당시 실제로 많은 집들이 최저가에 매매되었고, 현금을 보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여러 채를 샀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큰 부를 축적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위기는 기회다.
영화 [작전]에서는, 작전세력이 A 주식을 대량 매수한다. 그리고 내부자를 이용하여 그 회사에 아직 발표되지 않는 큰 호재가 있다며 소문을 내기 시작한다. 개미투자자들은 소문의 진위여부도 파악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투자금에다 대출을 얻어 몰빵 한다. A 주식의 가격은 순식간에 오르고, 작전세력들은 높은 가격에 가지고 있는 A주식을 전량 매도하고 잠적한다.
한쪽이 따면, 한쪽은 잃는다.
극단적인 예시였지만, 위기가 왔을 때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양극단으로 몰아넣는 속성이 있다.
사회의 약자 층을 보호하기 위하여 최저임금을 급진적으로 올렸다. 자본가들의 수익이 나빠지기 시작했고 그들은 재빠르게 새로운 시스템을 도입했다.
무인 시스템.
그전부터 무인 시스템은 개발되어 있었다. 하지만 설치, 관리비용이 비싸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사람을 고용하는 것이 비용적으로 더 효율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상황이 변했다. 최저임금이 올라 사람을 고용하는 것보다 무인시스템을 사용하는 것이 가성비가 더 높아져 버린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줄 서서 먹는 칼국수 집이 있는데, 돈을 엄청 벌었는지 큰 건물을 세웠다.
좀 더 쾌적해졌다. 그런데 음식을 나르던 이모님들은 점점 없어지고 그 자리에 로봇이 들어왔다. 나는 로봇이 날라다 준 칼국수를 먹는다.
프랜차이즈 음식점에 가면 주문을 받던 사람들을 찾기 어렵게 되었다. 그들이 있던 자리는 무인 주문기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계층을 위한 정책이 그들의 일자리를 빼앗은 아이러니한 결과가 발생되었다.
이런 경향성으로 우리는 자본의 양극화를 경험하고 있다.
영화[기생충]이 전 세계적으로 각광을 받은 데에는 영화의 훌륭함에도 있지만 우리 모두가 겪는 양극화를 정확하게 꼬집어 내서 그런 것 같다.
또 넷플릭스[오징어게임]도 자본주의 루저들의 치열한 생존게임을 VIP들이 즐겁게 관람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 내 현실과 너무 닮아있어서 전 세계적으로 그 난리가 난 게 아닐까?
영화 [노매드랜드]에서도 ‘리먼 브라더스 사태 때 헐값으로 나왔던 아파트를 더 많이 사뒀으면 좋았을 텐데’라고 한 남성이 푸념하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 펄은 그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인하여 다니던 일자리도 잃고, 살던 집도 잃었다. 그런 그녀 앞에서 돈을 더 벌었어야 한다면 푸념하는 한 남성. 잔인한 장면이다.
돈의 속성은 참 인정머리도 없다.
하지만,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삶의 끝자락에 몰렸어도 새로운 삶의 방식을 만들어 또 살아간다. 주인공 펄처럼 말이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홈리스가 아니라 하우스리스라고.
낡은 밴을 고쳐 갑갑한 차 안에서 생활하지만 아침에는 대자연 안에서 일출을 볼 수 있고 따뜻한 차를 마실 수 있다.
그녀는 직장도 없고 집도 없고 가족도 없다. 어디에 매이지 않은 그녀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삶을 산다.
돈이 떨어지면 일용직 근로를 해서 돈을 벌고, 외로우면 같은 노매드족(=캠핑족)들과 연대를 한다. 보잘것없는 음식이지만 서로 나누며 파티도 즐긴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떤 할머니는 답답한 병원에서 자신의 마지막을 보내기보다는 평생소원이었던 알래스카에 직접 자동차를 몰고 간다.
거기서 자신의 삶의 마지막을 보내고 싶다고 말이다.
영화는 그녀의 삶을 그저 판타지로 그리지만은 않는다.
아무도 없는 사막에서 자동차가 망가져 버려 오도 가도 못 할 수도 있고,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어 음식을 사지 못할 수도 있고 또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녀도 위태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정착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나오는데 모두 스스로 거부한다.
그녀는 새로운 삶의 방식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독립영화 [소공녀]에서 보면, 주인공 미소는 프로페셔널한 가사도우미로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처럼 집을 사려고 하지 않는다. 아니 그녀는 집에서 살려고 하지 않는다. 그녀를 바라보는 곱지 않는 시선들이 그녀를 무시하지만 그녀는 당당히 일한 대가로 자신이 좋아하는 한 모금의 위스키와 담배를 산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다름과 선택의 문제인 것이다.
영화 [노매드랜드]의 펄과 [소공녀]의 미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