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것의 강렬함
극장에서 영화 <휴민트>를 너무 재미있게 봐서, 저녁에 전작에 해당하는 영화 <베를린>을 다시 찾아보았다.
액션 장면의 날것의 강렬함과 전체적으로 회색빛 톤으로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는 좀 더 살아 있었지만, 아무래도 10년 전 작품이라 만듦새는 조금 아쉬웠다.
영화 <베를린>의 마지막 장면에서, 하정우는 묵묵히 블라디보스토크로 발걸음을 옮기며 <본 시리즈>의 제이슨 본과 닮은 고독한 뒷모습을 남겼다. 그 결말은 <휴민트>에 이르러 "결국 진압당했다"는 대사 한 줄로 차갑게 요약된다. 시스템이라는 바위 앞에 개인은 그저 깨지는 계란일 뿐이라는 류승완 감독식의 허무주의의 완성 아닌가 싶다.
<베를린>의 압도적인 매력 중 하나는 단연 류승범이다. 껄렁한 모습과 함께 자신만만하고 급한 성격으로 적에게 허점을 보이는 캐릭터가 꽤나 재미있다. 사람은 언제나 배신한다는 그의 믿음이 오히려 역공의 대가가 되는 아이러니도 재미 포인트다.
류승범이라는 빌런은 처참하게 단죄받지만, 정작 그의 아버지는 북한 권력의 핵심에서 여전히 승승장구한다. 꼬리 자르기에 능한 국정원이나, 부패한 권력이 대물림되는 북한이나 시스템의 생리는 닮아 있다. <베를린>은 이처럼 부조리한 현실을 건조하게 보여준다.
영화 <베를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석규의 태도다. 왜 하정우를 돕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냥 일이라서"라고 답한다. 동포애나 정의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걷어낸 이 건조한 직업의식이야말로 그의 행동을 설명할 수 있는 확실한 동기가 된다. 영화 <휴민트>에서 조인성의 행동 동기가 정의감이나 인류애, 또는 죄책감에서 출발하는 것보다는 좀 더 현실적이라 좋았다.
북한 요원들의 잔혹한 살육전을 목격하며 패닉에 빠지는 한석규의 모습은, 시스템 안의 현대인이 마주한 '날것의 폭력'에 대한 공포를 탁월하게 묘사해서 좋았다. 항상 건방지고, 모든 사람을 내려다보면서, 판을 읽는 머리 좋은 사내지만, 진짜 무서운 장면을 보면서 잔뜩 쫄아버리는 찰나의 얼굴이 인간적으로 다가와서 말이다.
영화 <베를린>과 <휴민트> 사이의 가장 큰 변화는 여성 캐릭터다. <베를린>의 전지현(련정희)이 구원받아야 할 피해자이자 남성 서사의 동력으로 소비되었다면, <휴민트>의 신세경은 훨씬 주체적이다. 스스로를 '시스템의 버그'로 규정하고 길을 주도적으로 찾아 나서는 모습에서 지난 10년간 한국 영화 속 여성 서사가 거둔 유의미한 진보인 것 같다.
<베를린>이 거칠고 건조한 액션의 쾌감을 선사한다면, <휴민트>는 그 유산을 이어받아 대중적인 매끈함을 더했다. 표종성 (베를린의 하정우)이 블라디보스토크의 눈발 속으로 사라진 뒤 10년, 류승완의 유니버스는 더 매끈해졌고, 섹시해졌다. 비록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지라도, 시스템에 균열을 내는 '버그'들의 싸움은 언제나 흥미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