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휴민트>를 보고,

<베를린>의 진화와 <본> 시리즈의 속도감.

by 노정희


류승완 감독의 신작 <휴민트>는 시작부터 끝까지 차가운 느와르의 공기와 짙은 갈색 미장센으로 관객을 압도한다. 특히 이 영화에서 조인성이라는 피사체는 미학적 필수 요소다. 명암이 교차하는 첩보물의 세계에서 그의 훤칠한 기럭지와 실루엣은 화면의 구도를 완성하는 도구가 된다. 초반의 미세한 발성 문제를 극복하고 안착한 조인성은, 분석과 이성 너머의 ‘이상적인 인본주의’를 보여주며, 극의 중심을 잡는다.


​이 영화의 가장 매혹적인 지점은 인물들의 설정에 있다. 등장하는 세 명의 주인공은 모두 각자가 속한 체제와 시스템 안에서 발생한 '버그(Bug)'들이다. 그들은 자신을 길러내고 억압하는 시스템을 증오하며, 그 시스템 속의 오류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한다.

​조인성의 이상주의자적 동기로 그의 행동을 설명하는 데, 조금 부족한 부분을 박정민 캐릭터가 채워준다. 박정민은 사랑하는 이를 구해야 한다는 처절하고 명확한 동기로 관객의 감정을 완벽하게 견인한다. 여기에 신세경 또한 구원의 대상에 머물지 않고, 스스로 움직이는 주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남녀 주인공이 서로를 전적으로 보호하거나 구원하지 않고, 대등하게 연대하는 모습 좋았다.


​영화는 <모가디슈>가 보여준 남북 협력의 메시지를 계승하면서도 액션으로 장르 변환한 느낌을 준다. 전체적인 줄거리는 마치 <베를린>의 업그레이드된 후속편처럼 교묘하게 이어지는 지점이 있으며, 할리우드의 <본 시리즈>를 연상시키는 액션은 첩보물의 세세한 디테일을 놓치더라도 그 자체만으로 충분한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연출만으로도 충분히 전달되는 메시지를 대사로 한 번 더 짚어주는 감독의 '친절함' 덕분에 관객은 길을 잃지 않고 서사를 따라갈 수 있다.


​몇몇 장면은 김지운 감독의 <놈놈놈>이나 <밀정>의 비장미를 떠올리게 한다. 다만, 마지막에 굳이 삼자대면으로 총을 겨누는 씬은 <놈놈놈>의 오마주 같아 보였다. 그 연출 장면을 위해 억지로 설정을 맞춘 느낌이 들어 다소 매력적이지 못한 아쉬운 대목으로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미상관의 장면설계와 임무를 마치고 자신의 본거지로 돌아가는 조인성을 중심축으로 남겨두고, 주변 인물을 교체하며 시리즈로 확장할 수 있게끔 설계된 것 같은 이 영화는, 류승완 감독이 구축한 첩보 유니버스의 시발점이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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