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고 싶다는 최초의 욕구는 뻔한 이유였다. 내 속에 있는 것들을 방출하고 싶다는 배설욕. 그렇게 변기에 싸질러 물을 내리면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그게 아쉬워 어느 순간부터 물을 내리지 않게 된 것 같다. 배설물을 꺼내 손으로 빚어 ‘읽히도록’ 만드는 과정은 더럽고 지독했다. 그 불결함을 이겨내고 잘 빚어내면 그것은 읽히는 글이 되었다.
유난히도 역겨운 감정을 배설하게 될 때가 있다. 그래, 이건 설사다. 더러운 비유라고 질타받기에는 글을 쓰는 현실과 다를 게 없어 딱히 억지 비유도 아닌 듯싶다. 폭풍 같은 설사를 하고 나면 막막하다. 이걸 빚어야지. 어떻게? 어떻게 만지지? 정해진 형체도 없는 내 배설물을 어떻게 만지지. 그렇다고 물을 내려 잊어버리는 짓은, 이제는 하고 싶지 않다. 그러기엔 내가 먹은 상한 음식이, 복통의 시간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이제는, 배설로 끝내고 싶지 않다.
최근의 나는 연말을 준비하며 기대에 차 있었다. 10월 즈음되면 이것저것 하고 싶은 것이 많아지기에 그랬다. 12월에 있을 신춘문예를 포함해 여러 공모를 준비했고, 일본어도 배우고 있다. 그리고 최근의 악재를 열거하자면, 직장이 생겼다는 것(그 자체), 직장 때문에 원하는 것들의 시간을 맞출 수 없다는 것, 프로젝트를 준비하던 팀이 일방적으로 프로젝트를 무산시켰다는 것, 그 프로젝트 때문에 포기한 계획이 많다는 것, 돈이 없다는 것, 공부가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는 그러한 상한 음식을 전부 먹어치웠다. 오늘 피곤하지만 24시 탐앤탐스에 나온 것은, 면역력이 약한 상태에서 외부 활동을 한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최근 일만 하며 살아서 의무적으로 노트북을 들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카페에서 위의 상황에 기반한 감정들이 문자라는 형태도 없이 배설되었을 때, 막막해서 울고 싶어졌다. 이걸 어떻게 떠내려 보내. 그렇다고 내 손으로 어떻게 만져. 어쩌지 못하고 그대로 있을 뿐이었다.
눈물이 고일 뻔했을 때 옆자리에 앉은 사람이 에어팟을 내 발치에 떨어뜨리지 않았다면, 그래서 내게 눈인사를 건네며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면, 내가 의자를 끌어 발을 치우지 않았다면, 왈칵 눈물이 나왔을 거다. 누가 피자를 시켰나 보다. 냄새가 좋다. 탐앤탐스에는 별게 다 있어 참. 프레즐도, 피자도, 에어팟을 떨구는 사람도. 자리만 없다. 시험기간이라 대학생이 많아서 그렇다. 그럼에도 겨우 난 내 한 자리에 감사하다. 이제는 그냥 피자가 먹고 싶어졌다.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상한 음식과 복통의 시간을 아까워하지 말아야지. 맛있는 걸 먹고 행복해져야지. 더 행복한 글을 써야지. 다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