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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원 Aug 28. 2023

나를 매마르게 만드는 너에게

 



  어젯밤, 너와 정신없이 싸워서 정말 정신이 없어진 건가. 아침에 일어나 시계를 봤을 때, 시간을 잘못 인식했다. 다행히도 께름찍한 기분에 금방 일어나 시간을 확인했고 다급하게 출근 준비를 했다. 세수를 하고, 새 스킨을 개봉하다 엎어버렸다. 대충 닦아놓고 나가려는 순간, 문이 활짝 열리지 않았다. 새벽배송으로 주문한 김치 10kg가 막고 있던 것이다. 나는 박스를 뜯어 김치를 냉장고에 넣었다. 지하철 시간을 확인한 뒤 뛰었고, 겨우 지각을 면했다. 도착해 바지 밑단에 달린 조임끈을 조이려는데, 조임끈이 끊어졌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3시였다. 오늘은 자잘하게 힘들었으니 눈 좀 붙여야지, 30분만. 그런데 잠이 오지 않네. 의사 선생님은 내 기분이 바닥에 떨어지면 반동처럼 탁 튀어 오르는 경향이 있다고 했었다. 오늘이 아마 그런 날인가 보다. 누워있는 걸 멈추고 몸을 일으키고 싶어 그렇게 했다. 아침에 냉장고에 넣었던 김치를 꺼내 소분하고, 세니에게 연락해 김치를 주겠다고 했다. 세니는, 그럼 자신은 수박을 주겠다고 말했다. 밥을 먹고, 욕실에 들어갔다. 작은 원룸에 딸린 작은 화장실이었지만, 그 순간 나는 그곳을 욕실로 지칭하기로 했다. 좋아하는 플레이리스트를 틀고, 온몸을 온수로 적셨다. 그리고 화장실 바닥에 앉아 물을 맞았다. 평소라면 화장실 바닥에 앉지 않는 나였으니 일탈감도 느껴졌다. 그 모든 것이 좋아하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아, 그저 좋았다. 그리고 어디선가 받은 바디워시를 세면대에 잔뜩 부었다. 향은 마음에 들었지만 사용하고 나면 몸이 건조해지는 바디워시였다. 아깝다는 이유로 나를 챙기지 않는 것은 피하고 싶어 확 부어버렸다. 새로 산 바디워시가 나를 기다리는데 이렇게 매일을 보낼 수는 없지. 나는 내가 좋아하는 바디워시에게 갈 테야. 바디워시가 있는 세면대에, 물을 넣으니 거품이 가득 찼다. 그리고 한순간에, 많은 거품이 화장실 바닥으로 넘쳐흘렀다. 온통 거품이야. 어쩌면 멋진 호텔에서 거품 목욕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잠겨 있다가 바닥의 거품을 모두 흘려보냈다. 그리고 쭈글쭈글해진 손가락으로 수건을 집어 몸을 닦았다. 아침에 쏟았던 스킨은 생각보다 발림이 좋았다. 아침엔 그걸 몰랐네.



  좋아하는 옷을 입고 머리를 말린 뒤, 편한 슬리퍼를 신었다. 카페에 와서 글을 끄적이다 보니 너에게 연락이 왔다. 어제는 내가 생각해 보고 연락한다 하고 끝났었지. 내 감정을 제어하지 못해 험하게 했던 말들을, 차분하게 정리해 전달했다. 요약하자면 여전히 생각을 정리 중이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바디워시 같은 것 아닐까? 내 몸에 맞지 않으면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것. 물론 새로운 바디워시가 기다리고 있지는 않다. 충동적으로 버리는 것도 피하고 싶고. 싸운 이유는 우리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평행선, 그 진부한 표현이 딱이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 때문에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걱정하는 미래가 현실일 것을 알아 두려워서 그랬다. 어차피 좁혀지지 않을 평행선이니까. 내 체질이 변하지 않는다면, 그 바디워시는 나를 평생 건조하게 만들 테니.



  차마 너에게 바디워시 같다고 하지는 못했다. 소모품에 빗대어 말하면 누가 좋아하겠니. 네가 모르게 말하자면, 너는 마음에 쏙 드는 향을 가진 바디워시야. 살갗에 잔향이 남아, 늘 기분 좋게 해주지. 그런데 내 피부는 건조하다고 난리네. 어떤 때는 가렵기까지 해. 그런 너를 계속 사용해야 할지 모르겠어. 여전히 하고 있는 생각(정확히는 고민이지. 계속 만나야 할지)이 어떻게 결론나는지에 따라, 오늘이 다르게 기억될 거야. 우울하고 무기력했던 나날을 마치고 반등하는 날일지, 헤어지고, 슬퍼질 나날에 극명하게 대비되는, 최후의 만찬 같은 날일지. 어떻든 간에, 목욕을 마치고 나서 만큼은 정신이 맑아서 좋다. 솔직한 바람은, 피부가 건조하지 않았으면 하는 것.



  내 입맛대로 리뉴얼될리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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