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드는 집

05 성신여대 동거

by 열원

스무 살 여름, H를 만나게 되었다. 지금에 와서도 H를 사랑해서 사귄 건지, 사귀어서 사랑한 건지 모르겠다. 조금 성급하게 만났던 것 같기는 하다. 누가 고백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그 연애는 어느 날 시작되었고, H는 내가 고시원에 산다는 것을 알고 동거를 제안했다. 그때의 나로서는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고시원에 살면 평생 우울할 것만 같았으니까. 게다가 H가 내게 부담하라 말한 월세는 저렴한 편이었다. 나는 H의 집으로 짐을 옮기고 총무에게 고시원 방을 빼겠다고 말했다.


시원했던 밤에 우리는 광화문을 걸었다. H가 어딘가 앉았고, 나는 그 무릎을 베고 누웠다. H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나는 장난스레 말했다. ‘왜, 혹시 팔구 년생이야?’ H의 대답은 ‘어떻게 알았어?’였다. 그냥 ‘팔구’가 입에 붙어 장난을 친 거였는데. 그걸 용케 맞췄다는 것이 신기하다기보단 상황 파악을 못해 얼이 빠져 있었다. H는 맨 처음 자신을 스물다섯으로 소개했고, 내가 의심하자 스물일곱이라 정정했다. 그런데 사실은 삼십 대였던 것이다. 나는 스물인데. 빼어난 동안은 아니었지만 삼십대로 쳐주기엔 젊어 보였기에 속았다. 배신감에 화가 났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내 짐은 H가 사는 성신여대 옥탑방에 있고, 이미 고시원 방도 빼기로 했으니 말이다. 나를 도망갈 수 없게 만들어놓고 이런 사실을 밝히는 H가 야속했다. 용서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었기에, H를 용서했다.


주변에는 하우스메이트를 구했다고 말했다. 갑자기 생긴 애인과 산다고 말하기도 무엇했고 그 애인이 열한 살 차이라고 말할 수도 없었다. 말하기 무엇했던 이유는, 그게 얼마나 비이성적인지 알아서 그랬고, 나이 차이가 걸렸던 건 괜히 귀찮은 말을 듣고 싶지 않아서 그랬다. 만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애인과 산다는 건 분명히 비이성적인 일이었다. 정작 그의 나이도 몰랐으니 말이다. 나는 자유가 있는 사람이고 싶었지, 비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남들에게 그렇게 비치는 건 죽어도 싫었지만 고시원에서 도망치고 싶어서 H와 살게 되었다.


그 옥탑방은 3층에서 한 층 더 올라가면 있었다. 옥상문에도 잠금장치가 있어 아래층 사람이 옥상을 쓸 경우는 없었다. 자그마한 녹색 옥상에 현관문이 있고 문을 열면 거실과 작은 방이 있었다. 거실에는 옥상 쪽으로 통창이 있었는데 우리는 현관문보다 통창으로 드나들 때가 많았다. 옥상문이 보안에 큰 도움이 될 만큼 견고하진 않았음에도 우리는 그 문 하나를 믿었다. 그 문 덕분에 통창을 잠그지 않고 편히 드나들었다. 하긴 누가 옥탑까지 올라와서 뭔 짓을 하겠어, 하는 마음으로.


흔히 열약한 주거 환경을 묶어 ‘지옥고’라고 부른다. (반)지하, 옥탑방, 고시원을 말하는 것이다. 지옥고를 주거빈곤이라 부르지만 나는 H의 옥탑방이 좋았다. 전기세나 난방비를 내가 부담하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 옥탑방은 고시원보다 훨씬 넓고, 조용하고, 햇빛이 잘 들었다. 우리는 거실에 매트리스를 깔고 잤는데 아침에 일어나면 커튼 사이로 햇빛이 들어왔다. 넓은 통창에서 오는 빛이었다. 그 집에서 깬 첫날에, 내가 아침 햇빛을 얼마나 좋아했는지를 깨달았다. 고시원에 사는 동안 고시원에서만 잠든 건 아니었다. 가끔씩 친구 집에서도 잤고 부모님 집에서도 잤다. 그런데 햇빛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건 그때였다. 앞으로 내가 살 곳에 햇빛이 들어오니 그제야 안심했나 보다. 이제 내가 먹고 자는 곳에서 햇빛을 볼 수 있으니 스스로에게 햇빛이 필요 없다는 거짓말을 안 해도 되는 것이었다.


나를 속이고 도망갈 수 없게 만들어놓은 H를, 만나는 내내 미워했다. 그럼에도 고마운 건, 나를 고시원에서 꺼내 준 것. 충분히 우울할 수 있는 고시원에 내버려 두지 않은 것에 고맙다. 아침에 드는 햇빛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일깨워줘서 고맙다. 밝은 아침을 맞을 수 있는 H의 옥탑방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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