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을 타면 어르신들을 자주 만난다. 머리가 하얗게 센 분도 계시고 한껏 자신을 꾸민 멋쟁이 분들도 계신다. 때론 삼삼오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입고 산행을 가는 분들도 자주 본다. 평범한 도시 속에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대부분 허리가 꼿꼿한 편이었다. 그렇게 허리가 곧은 할머니를 볼 때 '나의 할머니'가 생각난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강원도 산골에서 평생을 농부로 살아왔다. 내가 기억을 가진 순간부터 본 할머니는 허리가 굽어 멀리서 보면 'ㄱ'자로 표현할 수 있었다. 키가 작고 마른 편이어서 왜소해 보였다. 반면 흰머리 하나 없이 늘 검은 파마머리는 단정했다.
할머니는 농사꾼인 할아버지에게 시집와서 3남 2녀의 자식들을 두었다. 양가 모두 넉넉한 형편이 아니었는데 할아버지가 6.25 전쟁 당시 용병으로 끌려갔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가는 도중 탈출해서 산속에서 나뭇잎을 덮어 자고 돌아오다 돈이 없어 남의 집 일을 해주고 밥을 얻어먹으며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고 했다. 무사히 집으로 돌아왔지만 가난은 여전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쉼 없이 땅을 일구어 자식 모두 결혼시키겨 손자 손녀까지 봤다.
유년시절, 방학은 어김없이 할머니댁에서 보냈다. 농부였던 두 분에게 여름은 일거리가 많은 계절이었다. 할머니는 이른 새벽, 내가 자는 사이에 감자밭에 다녀왔다. 해가 높이 뜨면 일하기 힘들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더 일찍 논에 나간 후였다. 아침 7시가 되면 아침상이 차려졌다. 나는 잠시 눈을 떴다가 식사 중인 두 분을 모습을 보며 다시 잠들었다. 할머니는 내게 일어나면 밥을 먹으라며 한쪽에 밥상을 차려 보자기로 덮어두셨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닭의 밥도 주고, 외양간에 소에게 여물도 준다. 집 바로 옆쪽에 감자밭과 텃밭이 있었다. 할머니는 감자밭에 쭈그려 않아 호미로 질긴 잡초를 캐낸다. 이어서 텃밭에 심어진 고추와 오이, 상추를 딴다.
시골의 밥시간은 정확하다. 아침 7시, 점심 12시, 저녁은 6시다. 오전의 일이 마무리되면 점심 준비가 시작된다. 집 앞 텃밭에서 딴 채소들을 씻어 소쿠리에 놓아두고, 집 뒤꼍에 가서 막장을 그릇에 퍼 담는다. 땅에 묻어놓은 김칫독에서 새콤 시원하게 익은 묵은지를 꺼낸다. 도마 위에 오른 묵은지를 가지런히 썰어 접시 위에 담았다. 그 사이 뚝배기에 양파, 호박, 두부를 넣고 막장을 풀었다. 요즘 찌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된장맛이 진했다. 어릴 땐 김치와 된장이 싫었다. 시고 짠맛이 강하게 느껴졌다. 할머니는 후다닥 감자채를 만들어 상에 놓아주셨다. 고기보단 푸성귀가 많은 밥상, 두 분의 소박한 밥상이 그랬다. 은색의 동그란 양은 밥상 위에 반찬이 채워지면 할머니는 나를 불렀다 "은미야~ 가서 할아버이 불러 오니라" 문 밖에 놓인 할머니의 고무신을 신고 논길로 나갔다. 찍찍 신발이 커서 끌리는 소리가 난다. 논두렁에서 삽으로 둑길을 내고 있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러 오세요" "오냐" 할아버지는 꼬부라진 허리를 폈다. 하늘을 한번 보고 긴 숨을 내쉬고 모자를 고쳐 쓴다. 삽을 빼들어 길로 나왔다. 나는 삽을 대신 잡아들고 할아버지의 팔을 잡았다. "할아버지 오늘 몇 시에 나왔어요~?" 나는 질문을 늘어놓았다. 천천히 할아버지와 보폭을 맞추며 이야기를 하며 집으로 향했다. 할아버지는 마당에 수도 펌프가 있어서 밖에서 씻고 점심을 드셨다.
식사가 끝나면 두 분은 잠시 쉬었다 산 너머에 감자밭에 일을 하러 가신다. 할머니는 나에게 시계를 보며 새참을 가져올 시간을 알려주셨다. 나는 풀을 뜯어 닭에게 주고, 외양간에 기웃거렸다. 강아지랑 놀아도 심심해졌다. 결국 나는 조금 일찍 새참을 챙겨 강아지와 감자밭으로 향했다. 저 멀리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일 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렸지만 힘들어 보인다 라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새참을 드시고 한동안 더 일을 하다 집으로 돌아왔다. 할아버지는 논을 한 번 더 보러 나가셨다. 할머니는 짐을 정리하고 씻은 후 저녁준비를 하셨다. 상이 다 차려질 즈음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불러오라 하신다. 나는 할아버지를 마중 나가식사시간을 알렸다. 두런두런 얘기를 하며 집에 돌아와 식사를 하고 나면 하루의 일과가 끝난다. 쉬었다가 상을 정리하고 뉴스를 보다 일일 연속극을 본다. 연속극이 끝나면 두 분의 얼굴엔 잠이 한가득 내려와 있었다. 그렇게 9시. 시골의 모든 불이 꺼졌다. 집 주변에 가로등이 없다 보니 밤이 더 까맣게 느껴졌다. 옆방엔 창호지 문이 있었는데 그 사이로 개굴개굴, 개구리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
할머니댁 병아리들
할머니는 일이 없을 땐 이웃집에 가서 담소를 나누기도 했고, TV 를 보기도 하셨다. 그것도 오래 보는 편이 아니었다. 가끔 할머니는 밖을 물끄러미 바라보곤 하셨다. 그럴 땐 나도 옆에 가만히 앉아 밖에 뭐가 있나, 할머니는 무얼 보는 걸까 한참 생각했던 것 같다. 자기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 웃음이 잘 보이진 않지만 무표정이 무섭지 않은 사람, 나한테는 한없이 따스했던 사람이 할머니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왔는지 경이로울 뿐이었다. 나중에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로는 할머니는 눈물이 많으셨다고 했다. 두 분이 서로 의지하며 울기도 하셨다고 했다. 어린 나에겐 보이지 않았던 어른의 시간, 창 밖을 바라보던 할머니의 마음은 무엇이었을까. 이웃집에 비구니 스님이 몇 년 사신적이 있었는데 스님을 만날 땐 할머니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야기를 나누며 웃는 모습도 봤다. 인자한 미소로 사람을 맞아주는 스님의 모습이 기억난다. 나는 스님이 오래 이 마을에 머물렀으면 했다.
한낮의 오후 할아버지와 할머니
어릴 땐 몰랐다. 서울에 와서 보니 멋쟁이 할머니들이 많았다. 심지어 허리가 꼿꼿했다. 우리 할머니도 농사를 안 지었다면 어땠을까, 차라리 도시 사람이면 더 좋지 않았을까. 자주 생각한 적이 있었다. 6.25를 겪어내며, 최선을 다해 살아온 모습이 존경스럽지만 고생한 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 15년 넘게 치매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우리 할머니. 할머니가 떠나고 나니 좋은 기억보단 더 나누지 못한 시간들이 떠오른다. 더 잘해드릴걸, 더 많이 찾아뵐걸. 할머니가 그리운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