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산책이 유독 달았다. 이런 날엔 시원하고 달큰한 밤공기에 흠뻑 젖어버리고 싶어서 오래 걷는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에 대해 곱씹다 보니,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강물의 비릿한 냄새가 코 끝을 찔렀다. 여기까지 왔다는 건 꽤 오래 걸었다는 뜻이다. 이제 이 정도쯤은 굳이 시계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원래 이쯤에서는 왔던 길로 발걸음을 다시 돌리지만 오늘은 왠지 멈추고 싶지 않아서 조금 더 걸었다.
그러다 발이 아파올 때쯤, 나무 옆 벤치에 앉아 듣고 있던 음악의 볼륨을 높였다.
눈을 감고 밤의 소리를 듣네
그때 모과 냄새가 소리 없이 흐르네
-백현진, <모과>
모과, 참 오랜만에 듣는 과일이다. 향은 누군가의 기억에 머물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까. 찐득한 불안이 꼬리를 물던 시절, 모과와 너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만 같다던 가사가 자꾸 마음에 얹혔다.
다소 과장하면, 모과와 너만 있으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뒤늦게 이런 고백을 노래하는 사람이라니. 그것도 ‘다소 과장하면’이라는 솔직하고 멋쩍은 말과 함께.
백현진이라는 아티스트의 독특한 매력에 취하는 기분이다. 술은 잘 모르지만, 뭔가 소주와 과일맛 칵테일과 막걸리가 모두 잘 어울릴 것 같은 신기한 사람이다.
과일이 들어간 숱한 노래 중 이토록 향이 진한 노래가 있었나. 그가 간직하고 있을 수많은 세상의 향기가 궁금해진다.
모과에 대한 나의 기억은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빠 차에 방향제로 쓰이던 노랗고 울퉁불퉁한 과일 한 알. 생각해 보니 여기저기 멍이 들고 흠집이 나 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부터 과일을 좋아했지만 모과는 굳이 먹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찾아보니 아주 시고 떫은맛이 강하며 식감도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속담이 있을 만큼 못생기고 맛이 없는 과일이다. 하지만 독특하고 개성 있는 향만큼은 어느 과일 못지않은 것 같다. 인조적인 향으로는 낼 수 없는, 생과 자체의 매력적인 느낌을 가장 그윽하게 품고 있다. 그리고 겉표면이 찐득한 이유는 향과 풍미를 좋게 해주는 성분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 가사에 찐득한 불안이 담긴 걸까? 그 깊은 향과 나를 바라보던 너의 눈빛이 영원히 잊히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함께 누워있던 낡은 정자가 특별하게 느껴지던 그 순간이 마음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으니 이런 노래가 나온 것이겠지. 어쩌면 굳이 모과가 아닌 다른 향이었다 해도 상관없었을지도 모른다.
모과는 늦가을이 제철이라던데 샛노랗고 향이 진한 걸 골라서 모과청을 담가보고 싶다. 쌀쌀한 가을에 따뜻한 모과차를 마시며 책을 읽으면 좋겠다. 남은 건 침대 머리맡에 놔두어야지.
가사에 흠뻑 취해 듣다 보니 옆에 서있는 나무가 마치 모과나무처럼 느껴졌다.
바닥에 떨어진 과육을 집어 들고 향을 맡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가을이 기다려지는 이유가 또 하나 늘었다.
살다 보면 어렴풋한 실루엣이 선명한 그림으로 바뀌는 순간들이 존재한다. 나에겐 오늘의 밤 산책이 그랬다.
모과향이 풍기는 까만 차를 타고 세상 어디든 갈 수 있을 것 같던, 말갛고 작은 나의 모습이 해상도 높은 사진처럼 떠오른다. 창문을 활짝 열고 고개를 내밀다가 엄마에게 혼이 나서 시무룩해지던 순간까지도. 잊었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여실히 살아나는 순간들은 늘 저릿하고 소중하다.
나도 모과처럼 누군가의 한 시절쯤은 물들였던 사람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