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노을빛의 석류향이면 어떨까

by 소혜


“새 샴푸를 사러 가야지
아침 하늘빛의 민트향이면 어떨까”


-이상은, <비밀의 화원>




은은한 석류향 샴푸를 샀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향을 고를 때마다 장난감을 구경하는 아이처럼 신이 난다.

복숭아향 립밤, 자몽향 핸드크림, 석류향 샴푸, 포도향 원두…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새벽의 눅진한 공기와 저녁노을빛의 석류향이 조용한 라디오처럼 방안을 맴돌고 있다.


오랫동안 복숭아향 바디미스트를 쓰다가 질려서 잠시 다른 향으로 바꾼 적이 있다. 그런데 주변 사람들은 여전히 내가 복숭아향을 쓰는 줄 알았다고 한다. 지금도 나를 떠올리면 가장 먼저 복숭아가 생각난다는 사람도 있다. 누군가의 이미지가 향으로 기억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지금은 말갛고 깨끗한 꽃잎 위에 잘 익은 과일즙이 톡 떨어진 듯한 향을 쓰고 있다. 바람이 스칠 때마다 기분 좋은 달콤함이 은은하게 퍼진다. 가벼운 산책을 할 때도 꼭 뿌리고 나간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지만, 가끔 잊어버리고 나간 날은 무언가 두고 온 것처럼 허전한 기분이 든다.


내가 과일 말고 다른 향을 쓰는 것은 상상이 안 가지만, 남이 쓰는 것은 흥미롭고 매력적이라고 생각한다.

조금 오래전, 부끄럽지만 향기에 이끌려 누군가에게 반한 적도 있다. 사실 이미 마음이 기울어진 채로 그 향을 맡은 것일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믿고 싶다. 회색 안개가 약간 섞인 진한 코발트블루색 하늘 같은, 시원하면서도 포근한 아주 묘한 향이었다. 쿨하고 자신감이 넘치지만 부담스럽지 않고 편안한 그의 성격과 꼭 닮았다고 생각했다.

어느샌가 나의 시선 끝에는 늘 좋은 향이 나는 그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희미한 잔향이 밴 그의 목도리가 내 목에 둘러져 있었다. 처음 맡았을 때보다 훨씬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향에 괜히 기분이 간질간질했던 기억이 난다. 첫 향부터 잔향이 흐릿해질 때까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좋아서.

추운 겨울, 나를 따뜻하게 감싸던 목도리의 감촉과 그의 품에서 나던 향기가 마음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인연이 끝난 뒤에 어느 신호등에서 그 향을 맡은 적이 있다. 순간 어렴풋한 실루엣이 선명한 그림으로 바뀐 듯해서 나도 모르게 홀리듯 뒤를 돌아보았던 것 같다. 낯선 사람에게 실려 돌아온 익숙한 향과 기억에 잠시 마음이 저렸다. 그때도 아마 추운 겨울이었을 거다.

처음으로 나에게 목도리를 둘러주던, 입김이 선명하게 보였다가 금세 흩어지던 계절.


계절과 향은 추억을 소환하는 단단한 힘이 있다. 지금도 그 향을 맡으면 나는 다시 뒤를 돌아볼 것 같다. 그렇다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거나, 그에게 다시 안기고 싶다는 건 아니다. 또한 좋았던 기억을 부정하고 싶지도, 안 좋았던 기억을 굳이 예쁘게 포장하고 싶지도 않다. 그저 우연히 다시 마주친 향기에 마음이 저릴 만큼 내가 그 시절을 진심으로 지나왔을 뿐이다.


만약 그때 그가 다른 향을 썼어도 나는 사랑에 빠졌을까?

괜히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은은한 석류향이 나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린다.

샤워를 하고 나서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여전히 향이 남아 있다. 아마 앞으로 오래도록 쓰게 될 것 같다.


내 마음도, 글도 그랬으면 좋겠다.

누군가의 기억에 은은히 머물렀으면. 그래서 자꾸만 뒤를 돌아보고 싶은 것이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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