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작년보다 세상이 익어가는 속도가 조금 느린 듯하다. 계절의 감각은 단순히 기온뿐만 아니라 공기의 냄새, 바람의 결, 햇살의 무게 등이 어우러져서 느껴진다. 올봄은 푸근한 햇살을 기대하며 창문을 활짝 열었다가 쌀쌀한 바람에 몸을 떨며 다시 반쯤 닫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비바람이 치는 날도 꽤 많았다. 특히 초봄의 기온이 작년보다 낮아 꽃의 개화도 조금 늦었다고 한다. 앞으로 점점 여름이 길어진다던데, 그래서인지 적당한 온도의 봄가을이 더욱 짧고 귀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늘 그렇듯, 눈 깜짝할 새에 어느덧 초여름의 문턱에 와있다.
더운 걸 싫어하는 나는 여름의 도래가 그다지 반갑지 않으며, 조금이라도 더디게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한여름이 오면 종종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어지기도 한다.
문득 작년 일기장에 썼던 문장이 떠오른다.
“나에게 여름은 견뎌야 하는 계절이다. 계절을 나는 것과 견디는 것은 다르다. 내가 여름을 견디는 이유는 수박이다.”
내가 생각해도 참 우스운 말이다. 아마 집 근처 카페에서 수박주스를 사 먹은 날 썼을 거다. 과일을 좋아하는 나는 수박과 복숭아가 있었기에 숱한 여름을 백만 배는 수월하게 견뎌왔다고 자부할 수 있다. 무더운 여름에 새빨간 수박을 한 입 베어 물면 속이 뻥 뚫리고 매가리 없는 몸에 활기가 도는 것 같다. 요즘은 계절에 크게 상관없이 과일을 먹을 수 있는 세상이지만, 겨울에 먹는 수박은 마치 여름에 입은 스웨터처럼 어딘가 어색한 느낌이 든다.
여름의 뜨거움과 수박의 달콤함은 비례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햇살이 뜨겁게 내리쬐지 않으면 수박도 복숭아도 익지 않는다. 한껏 달궈진 낮의 햇빛과 비교적 선선한 저녁 기온이 조화를 잘 이루어야 한다.
제철이란 말은 결국 무사히 견뎌내어 도달했다는 뜻이다. 뜨거운 빛을 온몸으로 머금고 일교차를 견디며 달콤해지는 수박처럼, 견디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때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은 농익은 과일처럼 알맞은 때가 있다.
이렇게 생각하면 설익은 나도 제철을 향해 가고 있으리라는 느슨한 믿음이 생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