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

by 소혜


가끔 전에 썼던 일기장을 펼쳐볼 때가 있다. 분명 내가 쓴 것인데, 때로는 낯선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기분이 든다.


0926_가을, 커피, 비, 유재하

‘못 그린 내 빈 곳 무엇으로 채워지려나’

...

한낮의 더위가 가을비에 조금씩 누그러진다.
맑고 쨍한 날보다 흐린 날이 더 나다워진다는 생각을 한다. 얼룩덜룩한 보호 필름이 벗겨진 깨끗한 액정 같은 느낌. 물론 조금 더 예민하고 깨지기 쉽다.
별 것도 아닌 일로 응어리가 지는데, 표현하기엔 지나치게 티끌 같은 감정이라 묵혀둔다.
나는 아마도 남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뾰족한 사람일 것이다.


지난 초가을의 일기에서는 여름의 잔가지들에 대해 자주 이야기했다. 더위가 한풀 꺾일 무렵의 미적지근한 밤공기, 긴 방학이 끝난 듯 약간은 분주해진 일상, 한낮은 여전히 여름인 세상의 풍경, 그리고 계절의 틈에서 피어난 짙은 생각들이 끝나지 않을 것 같던 더위처럼 종이 위에 이어져 있었다.


일기는 왠지 쓰고 나서 오랜 시간이 지나야만 다시 볼 용기가 생긴다. 여러 번의 계절이 저문 뒤에야 꺼내볼 수 있는 마음에 대해 생각해 본다. 보는 이 없어도 편지를 쓰듯 고민해서 적은 마음. 품고 있기엔 버겁고, 드러내기엔 용기가 없던 마음. 그래도 적을 수밖에 없던 마음. 너무나도 만나고 싶었던, 그리고 만남과 동시에 비로소 떠나보낼 수 있던 마음까지. 손끝에 걸리는 문장들이 참 많았나 보다. 그건 조금 슬프지만 행복한 일이기도 하다.


오래 품고 있던 것들은 이렇게 쓰면서 더 선명해지기도, 흐릿해지기도 하는 것 같다. 안개처럼 무겁게 내려앉던 마음들이 아주 먼 곳으로 가볍게 날아갔으면 좋겠다. 멀리 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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