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기억을 마치 어제 일처럼 이야기하는 이들의 반짝이는 눈을 좋아한다. 기억은 시간이 아닌 마음의 기울기에 따라 흐릿해지거나 단단해지는 것이어서, 먼지 한 톨 없이 선명한 순간들이 가끔 마음을 두드릴 때가 있다. 이 글은 나에게 아주 중요하진 않지만 살면서 주기적으로 문득 떠오르는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열 살 혹은 열한 살 무렵으로 기억한다. 뜨거운 햇살과 초록에 흠뻑 젖을 것 같던 여름방학이었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는데 웬 키가 멀대같이 크고 새까만 남자애가 불쑥 나타나서 말을 걸었다. 같이 놀자고 했던 것 같은데 사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맑은 눈과 장난기 어린 미소를 보고 이상하게 마음이 간질거렸던 것 같다. 그렇게 예쁘고 맑은 눈은 처음이었다. 한쪽 뺨에 보조개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 애는 나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았고 낯선 얼굴인걸 보니 아마 근처 친척 집에 잠시 놀러 왔던 것 같다. 짓궂고 투박한 다른 남자애들과는 달리 상냥하고 부드러운 말투로 내게 계속 말을 걸었던 게 기억난다. 시골 학교에 서울말 쓰는 나긋나긋한 학생이 전학 온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부끄러워서 고개만 끄덕거릴 뿐 제대로 대화는 하지 못했지만 서로 통성명은 했다. 또박또박하게 말했던 이름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그 애와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점점 낯가림도 없어지고 이런저런 대화도 나누었다. 처음엔 여럿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그 애와 둘이서만 놀게 됐다. 나는 매일 그 시간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 애는 여름이라 해가 길어서 늦게까지 놀 수 있다며 활짝 웃었다.
우리는 동네 슈퍼에서 쌍쌍바를 사서 나눠먹거나 집에서 몰래 쌀 한 움큼을 가져와 비둘기에게 뿌려주었다. 불량식품 사탕을 먹다가 파랗고 빨갛게 물든 서로의 혓바닥을 보며 웃기도 하고 운동장 벤치에 나란히 앉아 축구하는 애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학교 운동장에서는 항상 이상한 쇠냄새 같은 게 나.” 이렇게 말하며 코를 킁킁거리다 눈이 마주치면 꺄르르 웃음이 터졌다.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그 자리에 있었다. 손에 들고 있던 쌍쌍바가 손등을 타고 운동장 모래 위에 똑똑 떨어졌다.
그 친구가 사라진 건 며칠 뒤의 일이었다. 사라졌다기보단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간 것이겠지만 그때는 내 여름의 일부가 유실된 기분이었다. 헤어지기 전날 그 애가 했던 말이 마음에서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았다. 안녕, 잘 지내라는 흔한 작별의 인사도, 아쉽거나 슬픈 표정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우리 또 만나자.
나는 그게 당연히 내일이라고 생각했다. 다음날 매일 만나던 시간에 그 애는 오지 않았고 나는 한참을 그 자리에 혼자 머물렀다. 그리고 그 후로 한동안 그 애를 미워했던 것 같다. 간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내일 다시 올 것처럼 말했으면서. 괜히 동네를 서성거리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고 그 애가 정말 많이 보고 싶었다. 잠 못 이루는 열대야에도, 붉은 낙엽이 빼곡한 가을에도 서툰 그리움에 마음 한쪽이 종종 따끔거렸다.
살다 보면 기척도 없이 누군가 마음속에 왔다가 떠나갈 때가 있다. 이별을 겪고 나면 내가 마치 바람 빠진 풍선이나 12월 26일의 크리스마스트리가 된 것 같았다. 그때는 너무 어려서 그게 이별인 줄도 모르고 그저 마음을 앓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애는 나와 마지막 순간을 슬프게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또 만나자. 또 만나자, 우리. 그렇게 말했던 그 애는 어쩌면 나보다 성숙하고 멋진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제 못 볼 거고 난 여기에 다시 오지 않을지도 몰라. 이렇게 말해줬다면 나는 지금 이 글을 쓰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끝내 다정했던 누군가의 여운은 오랫동안 지속되고, 마음은 늘 그랬듯 여진에 흔들린다. 십 년도 넘은 일이 아직도 생각나는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 애는 잘 지내고 있을까? 또 만나자는 약속을 못 지키고 훌쩍 가버린 게 괘씸하지만,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면 용서해주려고 한다. 우울하고 불안한 날보다는 행복한 날이 더 많기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는 데에 시간과 마음을 쓰며 살고 있기를 바라며.
누군가의 행복을 빌어주는 일은 이유 없이 사랑스럽다. 나도 언제든 행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니까.
살갗에 닿는 공기가 많이 시린 걸 보니 이제 슬슬 겨울이 오려나보다. 나에겐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들이 많아서 이번 겨울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을 읽는 소중한 당신도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을 많이 나누며 저물어가는 한 해를 마음에 새겼으면 좋겠다. 때로는 해묵은 기억 속 누군가를 마음껏 그리워하며.
마지막으로 당신께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또 만나자, 우리. 특별한 이유 없이 이곳에서, 그저 만나기로 했단 이유만으로. 얼굴 한 번 마주한 적 없지만 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느슨하고 다정한 감각으로. 그렇게 오래오래 머무르기로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