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 물기를 머금은 산책로를 홀로 걷고 있었다. 짙은 흙냄새와 조금 가라앉은 공기, 분주하거나 느릿한 모든 걸음들이 성글게 엮여 밤의 풍경이 되어갔다. 차분한 바람이 머리칼을 스쳐갈 때마다 젖은 풀냄새가 났다.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냄새 같은 거겠지.
다정히 읊조릴 수 있는 문장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안도감이 피어오르던 밤이었다.
산책로 중간쯤 다다르자 부부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몇 걸음 앞서 있었다. 여자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고 남자는 옆에 조금 떨어져 묵묵히 그녀를 기다리는 듯 보였다. 천천히 걷는 그들을 지나쳐가려는데, 여자의 목소리가 귓가에 또렷이 맺혔다.
연명 치료를 하는 게 의미가 있을지...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는 반쯤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하다 곧 남자의 품에 무너졌다. 나는 흐느끼는 소리를 지나쳐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습기가 채 가시지 않은 공기가 밤을 무겁게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작년 봄 어느 병실의 공기도 다르지 않았다. 아빠는 입원하기 전부터 연명 치료 거부 의사를 밝혔다. 나는 왜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냐고 아빠를 책망하지도, 좋은 대로 하라며 선뜻 동의하지도 못했다. 다만 그 단어가 너무 무섭고 낯설어서 커피를 내리는 척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병상에 누운 아빠의 입에서 또 그 얘기가 나올까 마음을 졸였던 내 모습이 1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아주 선명히 떠오른다. 그때의 기억에 잠시 아득해질 때면, 우리 곁에서 버텨주고 있는 아빠의 마른 어깨를 본다. 딱 맞던 옷이 줄줄 흘러내려 쇄골이 드러난 채로 아빠는 자주 웃는다.
산책로에서 만난 여자는 그때의 나와 같은 어둠 속으로 미끄러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나 한 번쯤 지나야 하며 아무도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깊은 어둠.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을지는 모르지만, 환한 빛 아래서 잠시나마 숨을 고르고 있기를 바란다.
사랑하는 이들과의 이별은 내 삶의 영원한 화두이며, 나는 그 안에서 슬퍼질 때마다 밤을 오래 걷는다. 그렇게 걷다 보면 문득 어느 미완의 용기를 마주하곤 한다. 아니 어쩌면 미완을 껴안고 나아가는 용기일까. 무수한 질문과 걱정들을 성급히 결론으로 데려가지 않고, 기쁨은 기쁨으로, 슬픔은 슬픔으로, 오늘은 그저 오늘로 흘려보낼 수 있는 무언의 힘이 그곳에 있다.
눈이 녹지 않은 겨울의 산책로는 가을과 달리 한적했다. 그곳에 가면 늘 고요 속을 서두름 없이 걸으며 하루를 닫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쓸쓸하고 정체된 듯 보이지만 부지런히 봄을 맞을 준비를 하는 나무들 사이에서, 마른 가지 끝에 숨 하나를 조용히 얹어 둔 채로.
모든 얼굴에서 성급히 악인을 보는 내게
사랑은 비 온 날 저녁의 풀냄새 같은 거겠지 말했다
-안희연,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