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명(延命).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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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으면 그냥,
스스로 움직일 수 있을 때까지만 살고 싶다고 한다.
나도 마찬가지다.
자식에게 짐이 되고 싶지 않고, 누군가의 손에 하루를 더 연명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요양원에 가보면,
수많은 노인들이 보호받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이것이 사는 것인가 할 때가 있다.
스스로 먹지도 못하고,
자력으로 호흡조차 하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있는다는 것이 꼭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다.
왜냐하면 법적으로 죽음을 선택할 수 없기 때문이다.
스스로 음식조차 받아들이지 못해도 코에 관을 꽂아 영양을 공급한다.
장기는 이미 제 기능을 멈췄고, 육체는 더 이상 아무것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데도, 생명은 억지로 이어진다.
가족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라도 살아 있어야 할 것만 같고
하루라도 더 존재해야 할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건강했을 때 이야기다.
회복 가능성이 있을 때 이야기다.
그게 아니라면 남아 있는 이들의 이기적인 선택일 수 있다.
‘그냥 그대로 보내드리는 게 오히려 죄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죄책감 때문이다.
그래서 생명을 붙잡고 있는 것이지만,
그게 정말 본인에게 도움이 되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육체는 이미 세상의 일을 끝내고 돌아가려는데 붙잡혀 있는 것이다.
장기는 기능을 멈추었지만,
지켜보는 가족의 집착 때문에 그 길조차 허락되지 않을 뿐이다.
청개구리 이야기가 떠오른다.
말 안 듣던 청개구리가 세상 떠난 엄마의 말을 처음으로 들어주고는 비만 오면 운다는 이야기 말이다.
어머니의 유언을 효도라고
해본 것이 회한이 되어 운다는 이야기다.
사실, 어디에 묻든 무슨 의미가 있을까.
떠난 이는 아무것도 느낄 수 없고,
남겨진 이의 마음속에만 존재할 뿐인데 말이다.
요양원에 누워 있는 부모님의 모습도 그렇다.
정신이 멀쩡한 자식은
하루라도 더 살아주기를 기원하지만
그건 산자의 욕심이다
부모는 이미 모든 기력을 거두고,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산자의 입장에서 하루를 더 염원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위로가 정작 상대에겐 짐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붙잡고 있는 것이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붙잡기보다는,
진짜 사랑으로 떠나보낼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