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법.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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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글감은
살고 있는 주변에서 보고 느낀 것들이다.
그래서 가볍게 쓰고 싶다.
하지만 그 가벼움은
삶이 가벼워서가 아니다.
악착같이 건너온 무게를 이미 품고 있기 때문이다.
무겁게 살았기에 글은 가볍게 쓰고 싶다.
그래야 남들이 내 이야기에
다가올 수 있고,
그래야 나 역시
내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사실 나는
겪지 않아도 되었을 일을 겪었다.
하루이틀이 아니라
몇 년을 가슴앓이로 버텼고,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을 생각했는지 모른다.
몸은 살아 있었지만
삶보다 죽음 쪽으로
더 많이 기울어 있었다.
그 시절의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가 아니라
‘어떻게 덜 아플 수 있을까’였다.
그러다 닿은 곳이 영적 자아 탐구였다.
살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고통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기 위해서.
그러던 어느 날
아주 사소한 깨달음이 왔다.
바람이 피부에 닿을 때 바람을 안다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 안다는 것을 아는 그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는 것.
영혼이라 불러도 좋고,
그저 ‘있음’이라 불러도 좋은 것.
그걸 안다고 삶이 극적으로 바뀌지는 않았다.
아침은 여전히 오고,
해야 할 일도 그대로였다.
다만
외부의 조건에
나를 맞추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조금은 알게 되었다.
고통을 대하는 위치가 달라졌다.
아픔은 여전히 오지만
그 고통이 곧 내가 되는 일은
줄어들었다.
반응하기 전 아주 짧은 틈이 생겼고,
그 틈 덕분에
나는 매번 무너지지는 않게 되었다.
살아야겠다는 다짐도, 죽고 싶다는 생각도
이제는 붙잡을 대상이 아니라
지나가는 파동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삶은 대단해지지는 않았지만
덜 버거워졌다.
나는 여전히
가벼운 글을 쓰고 싶다.
그 가벼움은
무게를 모르는 가벼움이 아니라,
무게를 다 겪고 난 뒤에야 가능한 가벼움이다.
내 글 어딘가에는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위에 놓인 것은
죽음을 밀어내며 사는 사람이 아니라,
죽음을 알아본 채 오늘을 건너는 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