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의 혀를 찾아서
⸻
풍요의 바다 위에서,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요즘은 물건이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탈인 시대다. 시작은 보이지만 끝은 보이지 않는 홍수 속에서 광고는 쏟아지고 추천은 멈추지 않는다. 풍족함의 수면 위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만의 나침반을 잃은 채 떠다니는 듯하다. 사물은 흔해졌지만, 사물을 대하는 사유는 가벼워진 것은 아닐까.
어린 시절, 맛의 기준은 단순하고도 분명했다.
시장통에서 울려 퍼지던 외침이 곧 판단의 근거였다.
“꿀사과예요!”
“설탕 수박입니다!”
“꿀호떡이에요!”
단맛은 곧 품질 보증서였다. 혀가 먼저 알고, 마음이 뒤따랐다. 선택지는 많지 않았지만, 입에 닿는 감각만큼은 또렷했다. 투박했으되 정직한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세상의 입맛이 달라졌다.
단맛은 선망이 아니라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 혈압과 당뇨의 이름 아래 권좌에서 내려와 죄인의 자리에 앉았다. 흥미로운 장면은 그다음이다. 설탕을 멀리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소금이 박힌 빵을 사기 위해 긴 줄을 선다.
어제의 금기가 오늘의 유행이 되고, 오늘의 열광은 내일의 무관심으로 식는다.
속도가 어지러울 정도다.
문제는 맛의 변화가 아니라
‘좋다’는 말이 나오면 이유도 묻지 않은 채 따라가는 태도다.
그것이 과연 나에게도 좋은지 스스로 묻지 않는다. 모든 현상에는 밝음과 어두움이 함께 있는데, 유행은 늘 밝은 면만 조명한다.
물건이 필요해서 찾는 것이 아니라, 남의 욕망 위에 내 욕망을 얹는 것은 아닐까.
줄이 길수록 소유욕은 타오르고, ‘품절 임박’이라는 문구에 심장은 괜히 분주해진다. 필요는 사라지고, 뒤처지지 않겠다는 조바심만 남는다. 길게 늘어선 줄을 바라보다 보면 이런 생각이 스친다.
저 사람들은 물건을 사려는 것일까,
아니면 무리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사려는 것일까.
나는 맛집이라고 줄 서지는 않는다.
줄을 서지 않는다고 대단한 철학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입소문이라는 환각이 실제의 맛보다 과장되는 장면을 여러 번 보았을 뿐이다. 풍요란 선택지가 넓다는 뜻이다.
한 곳이 대단하다면, 그에 준하는 곳도 얼마든지 있다. 생명을 구하는 약이 아니라면, 굳이 내 시간을 저당 잡힐 이유는 없다.
아이들에게는 자기 주도적으로 살라고 하면서, 정작 어른들은 타인이 만든 기준에
자기 취향을 맞긴다.
남이 좋다 하면 사고, 나쁘다 하면 돌아선다. 그렇게 조금씩 자기 색을 잃어간다.
삶은 편리해졌지만, 그 안의 주체성은 오히려 헐거워졌다.
이제는
소란한 세상의 목소리를 한 걸음 비켜서서, 자기 마음의 소리를 들어야 할 때 인 듯도 하다.
“이것이 정말 내가 원하는 것인가.
아니면 남의 입맛에 나를 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잃어버린 ‘나의 혀’를 찾는 일은
결국 잃어버린 ‘나의 삶’을 되찾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