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설모와 솔방울

by 박희정

솔방울과 띠기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가 나무 위 청설모 한 마리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무언가에 홀린 듯 분주했다.

별일이야 있겠는가. 그저 솔방울 하나 붙잡고 그 속의 잣알을 꺼내려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을 게다.

녀석이 솔방울의 조형미에 반해 수집을 할 리는 만무하니, 그저 본능에 충실한 저 분주함을 나는 그저 짐작으로 바라볼 뿐이다.

청설모의 저 몸짓을 보고 있자니, 나 또한 저 녀석처럼 솔방울에 마음을 뺏겼던 ‘옛날 꽃날’이 떠오른다.


조청을 고던 날이었다. 싹 틔운 보리를 길러내어 자글자글 엿을 고다 보면, 불 조절이야말로 기다림의 핵심이었다.

짚불은 성격이 급해 너무 빠르게 타버리고, 장작불은 화력이 너무 세서 조청의 진득한 맛을 태워버리기 일쑤였다. 그때 요긴했던 것이 바로 솔방울이었다. 솔방울은 개수대로 화력을 가늠할 수 있어, 자글자글 뜸을 들이며 조청을 다리는 데는 그만한 명물이 없었다.


세월이 흘러 상경한 뒤에 보니, 도시 아이들도 나름의 방식으로 불을 조절하고 있었다. 쪼끄만 연탄 화덕 위에 국자를 얹어놓고 설탕을 녹이던 아이들. 훗날 ‘띠기’ 혹은 ‘달고나’라 불리던 그 놀이에서, 아이들은 설탕 그릇에 꽃가루처럼 달라붙어 붕어를 뽑고 잉어를 만들며 환호했다. 시골의 솔방울이나 도시의 연탄불이나, 무언가를 달콤하게 녹여내던 그 마음만은 매한가지였으리라.

엊그제 일처럼 선명한데, 어느덧 그 놀이도 그 풍경도 가뭇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사람도 자취도 없다.


가끔 어려서 놀던 동네를 찾아가 보면 생경한 기분에 휩싸이곤 한다.

하늘만큼 높게 보이던 담벼락은 이제 내 머리아래로 내려와 있고, 골목은 한없이 좁아져 있다.

세월은 이토록 무심하게 공간의 뼈대만 남겨두고, 그 속에 북적였던 삶의 흔적들은 썰물처럼 가져가 버리는 모양이다.

저편 시간 속의 기억들은 가끔 지금의 풍경 위로 겹쳐졌다가, 이내 신기루처럼 사라진다.


청설모는 여전히 솔방울을 까고 있고, 나는 이제 솔방울 없이도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고는 법을 안다. 다만, 공간만 남은 그 자리에서 여전히 서성이는 것은, 두고 온 소중한 흔적들에 대한 미련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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