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심은 국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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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대인 박해 (2)
유대인의 역사는 오래된 박해의 역사다.
그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누구라도 쉽게 연민을 품게 된다.
오랜 세월 추방당하고,
직업의 문이 닫히고,
게토에 갇히고,
끝내 홀로코스트라는 인간사의 가장 참혹한 장면까지 겪은 민족.
그 기록 앞에서는 말이 가벼워질 수 없다.
한 민족이 얼마나 오래, 얼마나 집요하게 밀려날 수 있는지,
그 역사는 인간 사회의 어두운 민낯을 보여준다.
그래서 유대인의 고통을 떠올리면
마음 한쪽이 저절로 무거워진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 생긴다.
그토록 깊은 박해의 역사를 지닌 민족이
오늘은 강한 국가를 갖게 되었고,
그 국가가 주변과 전쟁을 벌이는 모습을 볼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보아야 하는가.
나는 이제 이렇게 생각한다.
과거의 상처는
이해의 이유가 될 수는 있어도,
폭력의 허가증이 될 수는 없다.
한때 맞았던 사람이
훗날 주먹을 쥐었다고 해서
그 손이 저절로 선해지는 것은 아니다.
상처는 설명이 될 수는 있어도,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과거에 피해자였다고 해서
지금도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고,
지금 잘못하고 있다고 해서
과거의 고통까지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유대인의 박해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 고통에 공감하는 일은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오늘의 전쟁은
별개의 층위에서 보아야 한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유대인이라는 민족 전체가 아니다.
내가 묻고 싶은 것은
특정 시기의 국가 권력과
그 무력의 사용이다.
국가의 권력,
군사적 선택,
보복의 수위,
그리고 민간인의 희생.
이것은 과거의 비극과는 따로 판단받아야 한다.
과거의 박해는 기억해야 하지만,
현재의 폭력은 따로 심판해야 한다.
유대인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민족과 역사이고,
이스라엘 정부는
특정 시기의 권력이다.
비판은 혈통이 아니라 권력에게 향해야 한다.
책임은 민족이 아니라
무장한 결정권자에게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동정심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는 점점 더 분명하게 느낀다.
동정심은 국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가야 한다.
폭격 아래 떨고 있는 아이에게,
가족을 잃고 멍하니 서 있는 노인에게,
물과 빵을 찾아 헤매는 사람에게,
사이렌 소리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는 평범한 시민에게.
그가 이스라엘 사람이든,
팔레스타인 사람이든,
이란 사람이든,
그 앞에서 국적은 너무 늦게 도착하는 이름이다.
먼저 보이는 것은 사람이고,
먼저 다가오는 것은 고통이다.
정말 경계해야 할 것은
피해의 기억이 권력의 명분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어제의 피해자가
오늘의 가해자가 되는 장면이다.
역사는 이해를 구할 수는 있어도,
면죄를 구할 수는 없다.
나는 이제
누가 먼저 맞았는가 보다
누가 지금 울고 있는가를 보려 한다.
끝내 연민은 깃발을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 깃발 아래 떨고 있는 사람에게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