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심은 물을 주지 않아도.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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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란다의 화분들을 들여다보다니
물을 주고, 흙을 만져 주는 만큼 자란다.
정성을 들이면 살아나고, 관심을 주면 자라는 것이라고.
식물만 그런 게 아니었다.
근심과 걱정도 그랬다.
자꾸 생각하고, 오래 붙들고 있으면
그것들도 무성해졌다.
식물은 물을 줘야 크지만, 근심은 생각만 줘도 자랐다.
걱정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자리를 옮겨 다닐 뿐,
젊을 때는 젊은 이유로,
나이 들면 나이 든 이유로
늘 마음 한쪽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물론 안다.
위대한 사상가라도 궁핍 앞에서는 사상이 자유롭기 어렵다.
배고픔은 철학보다 급하고,
불안은 명상보다 먼저 사람의 가슴을 흔든다.
당장 생계가 흔들리는 사람에게
마음을 비우라 말하는 일은 때로 너무 가벼운 충고가 된다.
그래서 근심하는 사람을 함부로 탓할 수는 없다.
그 근심은 팍팍한 현실이 드리운 그림자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심이 현실을 해결해 준 적도 별로 없었다.
걱정한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도 아니고,
불안해한다고 상황이 나아지는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제자리에 있는데 마음만 먼저 닳았다.
같은 세상을 살아도
누군가는 마음속에 감옥을 짓고,
누군가는 그 자리에 창문을 내고 사는 것을 봤다.
사람을 끝내 지치게 하는 것은
그 현실을 붙드는 생각의 방식이 큰 짐이 될 때가 많았다.
현실이 늘 넉넉할 수 없다.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는 날도 쉽게 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한 가지는 내가 정할 수 있다.
내 마음밭에 무엇을 심고,
무엇에 자꾸 시선을 줄 것인가.
근심을 붙들면 근심이 무성해지고,
불안을 들여다보면 불안이 마음을 덮는다.
반대로 작은 기쁨을 살피고,
감사할 일을 놓치지 않고,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해 나가면
그 작은 평안도 자란다.
행복은 대단한 사건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마음에 심고
무엇을 오래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자라는 것이다.
결국 내가 데리고 갈 행복의 크기는
오늘 내가 무엇을 오래 바라보며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