쥐구멍에 든 볕을 읽다

by 박희정

쥐구멍에 든 볕을 읽다. ㅡ


내가 어렸을 적에는 망가진 나라를 복구하는데 온 국민이 나설 때였다.

먹고 살 식량이 많은 것도 아니고

학업을 많이 할 기회도 적었다

다들 궁핍의 세월을 보내는 시기였다.

마을의 젊은이들은 성장을 했던,

성장 중이던 하나둘 고향을 떠났다.

그들이 향한 곳은 ‘도시’라는 이름의 신대륙이었다. 시골엔 몸을 부릴 일은 지천이었으나, 생(生)의 도약이라 부를 만한 기회는 드물었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먼 곳을 기어이 ‘희망’이라 명명하며 떠나갔다.


하지만 도시는 그리 너그러운 땅이 아니었다. 떠난다고 해서 길이 단번에 환해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럼에도 그들은 떠나야만 했다. 멈춰 서서 막막함을 견디는 것보다, 움직이며 부딪히는 쪽이 차라리 덜 저릿했기 때문이다.


마을 노인들 중엔 글을 모르는 이들이 많았다. 덕분에 타향으로 떠난 자식들의 편지를 대신 읽어주기도 하고 불러주는 대로써 주는 일도 많았다.

편지를 읽어주는 동안 집안의 공기는 정지했다. 얇은 종이 한 장 속엔 타향살이의 고단한 무게가 겹겹이 접혀 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편지들은 수신인은 달라도 발신인들의 문장은 마치 형제처럼 닮아 있었다.


“겨울이 시작되어 엄동설한인데 기체후 일향만강하시 온지요.”


“여차저차 소생은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이렇게 글월 올립니다.”


안부는 짧았고, 애틋한 그리움은 쌓여 있었다.

문장이 비슷했던 것이 아니라, 그들이 통과하던 생의 궤적이 닮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편지의 말미엔 마치 주술처럼 이 문장 하나가 있었다..


“쥐구멍에도 볕 들 날이 있다 하더이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모를 그 말은 가난한 이들이 서로의 손바닥에 쥐여주는 작은 부적 같은 것이었다.

비록 쥐구멍처럼 좁고 어두운 방 한 칸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그 구멍 깊숙이 빛이 닿으리라는 믿음.

가진 것 없는 이들이 마지막 줄에 기어이 적어 넣고 싶었던 것은 희망이었다.


사실 쥐구멍에 볕이 들지는 의문이다.

든다 한들 온전한 쥐구멍일리도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불가능한 공간에 빛이 드는 풍경을 상상했다. 그 상상력 하나로 시린 겨울을 건너고 모진 타향살이를 버텨낸 것이다.


세월이 흘러 문득 궁금해진다. 정말 그들의 쥐구멍에도 볕이 들었을까.

특별히 성공했다거나 금의환향했다는 무용담은 못 들어 봤다. 그들은 묵묵히 살아

버텼으며 자식을 키우고 늙어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우리가 아는 방식의 화려한 성공이 없었다고 해서, 그들의 생에 끝내 볕이 들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남들이 부러워할 만큼의 부(富)는 아니었을지라도, 자식의 허기를 채우고 병든 부모의 아랫목을 덥힐 수 있었다면 그것이 바로 그들이 기다리던 볕이었을 것이다.


남들 앞에 내세울 만큼 눈부시지 않았을지라도 한 생애를 따뜻하게 덥혀준 온기였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들의 쥐구멍에는 분명, 그들만이 알아챌 수 있는 따사로운 볕이 머물다 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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