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아리다

by 박희정

깨달음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아리다 ㅡㅡ


한때는 깨달음이라는 문턱을 넘어서면 그 뒤의 삶은 비단길처럼 평온할 줄 알았다.

마음의 풍랑은 잦아들고 세상사는 거울 앞의 정적처럼 수월해질 줄만 알았다.


그러나 살아보니, 아니었다.


깨달았다고 해서 칼날의 차가움이 덜한 것도 아니고, 상실의 구멍이 저절로 메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은 여전히 날이 서 있고 삶의 무게는 조금도 가벼워지지 않았다.

깨달음은 고통을 증발시키는 마술이 아니었다. 삶이라는 생채기에 바르는 무통의 연고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히려 응시하며 알게 된 것은,

깨달음 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허기는 여전히 찾아오고 인연의 실타래는 여전히 엉키며 육신은 순리대로 저물어간다.


“깨달았다고 말하는 순간 이미 깨달음에서 멀어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 말의 무게를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때로 그 문장은 수행의 실체를 너무 높고 먼 곳으로 밀어 올려 평범한 사람의 정직한 체험마저 무효화하는 권위처럼 들릴 때가 있다.


하지만 내가 만난 깨달음은 소박했다.

거창한 신통력도 비밀스러운 주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손에 쥐어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시원하게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깨달아도 삶은 그대로다.


어쩌면 신앙을 가진 이의 뒷모습이 더 든든해 보일 때가 있다.

거대한 존재에게 삶을 의탁하고 기댈 곳을 가진 이는 적어도 덜 외로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깨달음의 길에는 믿는 구석 같은 것이 없다.

누구도 대신 짊어져 주지 않고 하늘에서 정답지가 떨어지는 일도 없다.

그럼에도 왜 그토록 깨달음을 갈구하는가.

그것은 오직,

삶을 있는 그대로 정면으로 마주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실제의 고통보다, 생각이 지어낸 허구의 고통 속에서 더 오래 길을 잃는다.

오지도 않은 내일을 미리 끌어다 쓰고,

아직 오지 않은 불행을 사실처럼 믿으며 스스로 무너진다.

실체 없는 그림자에 쫓겨 제 발로 수렁에 뛰어드는 셈이다.


깨달음 이후에 달라지는 지점은 바로 여기다.


망상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두려움이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지금 일어나는 이 불안이 현실의 파도가 아니라 내 마음이 빚어낸 ‘생각의 창작품’ 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아, 이것은 실재가 아니라 마음이 만든 허깨비구나.’


이 한 번의 알아차림이 고통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

그러나 고통 위에 또 다른 고통을 덧쌓는 어리석음은 멈추게 한다.


슬픔은 슬픔으로 남고,

비어 있음은 비어 있음으로 남는다.

다만 그 위에 ‘나의 불행’이라는 재난의 이름표를 덧붙이지 않으면 된다.


깨달음과 비깨달음의 차이는 세상을 뒤바꾸는 권능의 차이가 아니다.

현실과 생각을 분별할 수 있는가,

고통 하나에 상상의 짐 열 개를 더 얹어 스스로 짊어지지 않을 수 있는가,

그 소박한 차이일 뿐이다.



깨달음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아프고 시리다.

하지만 적어도 아픔과 ‘아픔이라는 생각’을 가려낼 수는 있게 된다.

아픔은 아픔대로 겪되 내가 만든 허깨비에 속아 스스로를 난도질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삶은 여전히 아리지만,

적어도 내 생각이 만든 칼끝으로 나를 더 베지 않게 되었으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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