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생각보다 짧은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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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죽음을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다.
죽음이라는 단어가 일상의 공기처럼 살가웠고, 때로는 도망치고 싶은 유일한 비상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나는 그 막막한 어둠을 밀어내기보다, 차라리 그 안으로 걸어 들어가기로 했다.
죽음에 관한 글을 쓰고 또 썼다.
잉크가 마를 때마다 두려움도 함께 휘발되기를 바라며, 나는 주구장창 그 심연의 기록을 이어갔다.
그렇게 쓰고 또 쓰다 보니
어느 순간, 마치 죽음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서늘한 바닥을 한 바퀴 훑어보고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끝에 다다랐을 때
뜻밖의 감각이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오히려 삶이 새로워졌다는 생경한 생동감이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유는 분명했다.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비로소 몸으로 이해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죽음이라 부르는 그 너머의 시간은
무생명의 상태로 수천 년, 수만 년, 어쩌면 수억 년을 지속할
무한의 영역이다.
그 영겁의 세월에 비하면
인간의 생명은 고작 백 년 남짓에 불과하다.
그 무한한 시간 속에서
‘존재한다’는 감각조차 없이
그저 머무르게 될 것이다.
어차피 그토록 긴 잠이 예약되어 있다면,
깨어 있는 이 짧은 백 년 동안
잘 살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억만 번의 밤 사이에 찾아온
단 한 번의 아침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이제 나에게 산다는 것은
무엇보다 나의 ‘육체’를 잘 유지하는 일이다.
영혼을 담는 그릇인 몸이 온전해야
비로소 세계와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굳이 그다음을 꼽자면
아주 미세한 차이,
호랑이 털끝만큼의 차이라도 있다면
그것은 나의 ‘정신’을 온전하게 지켜내는 일이다.
몸이 버텨 주고
정신이 제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삶’이라 부를 수 있다.
거창한 성취나 화려한 이름이 아니더라도
이 두 기둥이 단단히 서 있다면
그 자체로 생은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요즘 나는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보낸다.
나에게 주어진 이 몫의 삶을
가능한 한 알차게 누려보고 싶다고.
그렇게 충분히 존재의 감각을 만끽하다가
때가 되면
다음 차례의 누군가에게
이 자리를 넘겨주어도 괜찮겠다고.
죽음이 길기에
삶은 더욱 소중한 선물이었다는 것을
나는 바닥을 치고 올라와서야
비로소 배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