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너머의 세상. 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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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도시에서 온 젊은이들을 보면,
한마디로 말해 예쁘고 잘생겼다.
할머니들만 가득한 곳에 살다 보니,
젊은이를 볼 때 드는 생각이다.
저 많은 ‘젊음’은 다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노인의 얼굴에서는 왜 그 빛이 지워져 버렸을까.
‘누가 내 치즈를 먹었는가’를 묻는 사람은 봤지만,
그 많던 젊음이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는 이도 있는지 모르겠다.
나밖에 없는 것인가.
예쁘다 잘생겼다는 말은
실제가 아니라 각자의 기억 속 표상일지도 모르겠다.
방금 문을 밀고 들어왔던 그 젊은이는
문을 닫고 나가면서 사라졌으니,
내 안에 남은 것은 예쁜 아이였다. 잘생겼다는 기억뿐이다.
그렇다면 아름다움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실제로 존재했던 것인가,
아니면 보는 이의 마음이 빚어낸 환영일 뿐인가.
없다고 하자니 있었던 사람이고,
있다고 하자니 가버린 사람이다.
인간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는 그렇게 젊음의 기억이 남을 것이다.
가고 없는데 아름다웠다면.
그 아름다움을 의심하는 것은 문제일지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내가 제정신인가, 웃음이 난다.
없는 것을 불러오는 것이 그리움이고,
없는 것을 붙잡으려는 것이 집착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뜻인지도 모른다.
형체는 사라져도 그 사람의 존재는
기억이라는 공간에 머물러 있으니 말이다.
결국 실재가 남긴 것은 기억뿐이다.
예쁘다 잘생겼다는 말조차
기억 속의 한 조각일 뿐인가.
하지만 여전히 궁금하다.
그렇게도 아름답던 모습이 사라진 뒤
인간은 결국 비슷한 얼굴의 노인으로 변해 가는데,
젊을 적에는 왜 그토록 미추를 가르고,
그 기준에 따라 마음이 흔들렸던 것인가.
어차피 감자는 잘생기든 못생기든 요리의 재료가 되고,
곶감은 모양과 상관없이 과일일 뿐인데,
왜 인간만은 미추에 따라
그렇게도 끌리고 멀어지는지 말이다.
그래도 궁금하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서 그런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