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몰 트라우마’는 작지만 깊은 상처를 내는 일상의 경험과 사건이 반복되는 것을 말합니다. 스몰 트라우마(Tiny Traumas)의 저자 멕 애럴에 의하면 사소한 상처는 결코 사소하지 않습니다. 작고 일상적인 것들이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듯이 우리의 열정과 잠재력을 메마르게 하는 것 역시 작고 일상적인 상처들이라고 합니다. 위클래스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유감스럽게도 아이들이 가진 깊은 상처가 부모로부터 비롯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봅니다.
이쯤 되면 “역시 부모의 양육태도가 아이의 나머지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그 당시 채워주지 못한 사랑과 관심 때문에 모든 문제가 발생한다라는 뻔한 이야기를 하려는 모양이군, 그래서 뭐 이제 와서 어쩔티비!!!” 라고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도 그런 결정론적인 입장을 좋아하지 않지만, 아이들이 제일 먼저 만나는 작은 세상은 부모(주양육자를 편의상 부모라고 부르겠습니다)이다 보니 영향을 안 받을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대화가 거의 없는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는 그런 모습이 상호작용의 표본으로 받아들여질 것이고, 폭력이 난무하는 관계를 보며 자란 아이들은 그런 세상을 자신이 속한 배경으로 이해하며 자랄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부모님과 함께 생활해온 아이에게 세상은 예측할 수 없는 안전하지 못한 곳으로 여겨질 것입니다
제게 누구를 나무랄만한 그런 자격도 없지만, 저 또한 부모의 역할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아니기에 우리의 말과 태도를 한번 돌아보자는 취지이니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모르겠어요'라는 도돌이표에 갇힌 창민이 -
이제 창민(가명)이라는 고등학교 1학년 남학생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표정에 변화가 없고 말소리가 힘이 없습니다. 질문을 하면 답을 하는 방식이 이러든 저러든 상관이 없다는 듯 “그러게요”, “모르겠어요”, “그러게요”로 도돌이표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듭니다. 정말 옆에 있는 사람까지 무력하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지요.
얘기를 하다가 “너는 무엇을 하면 가슴이 설레고 기분이 좋아지니?” 물었더니
“그런 거 없어요”라고 합니다. 살아오면서 즐겁고 좋았던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을 텐데 생각하기도 싫은 것 같고 창민이가 돌아보는 십몇 년의 인생은 온통 먹구름 색깔인 것 같습니다.
창민이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자주 다투셨다고 합니다. 형이랑 둘이 이불을 덮어쓰고 언제쯤 싸움이 끝날지 울면서 기다리고는 했는데 언젠가부터는 게임을 하는 데 방해가 되니까 그게 더 짜증이 나서 어느 날은 폭발하게 되었지요. 욕을 하면서 그만하라고 소리를 치니까 아버지가 더 열이 받아서 아들 뺨을 한 대 치게 됩니다. 엄마는 아들이 더 맞게 될까 봐 급기야 112에 신고를 하고 경찰이 오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납니다.
이럴 거면 왜 같이 사는 건지, 아버지가 뭘 잘했다고 자신에게 손찌검을 하는지 어른들이 한심해 보이고, 동네 사람들 보기 창피하고, 공부는 해서 무슨 소용인가 아무것도 하기 싫어집니다. 창민이는 이후 학교도 가지 않고 친구도 만나지 않고 세상과 단절하게 됩니다. 그런 기간이 자그마치 중학교 시절 2년입니다. 겨우 고등학교에 진학은 했으나 수업을 따라가기도 어렵고 무얼 해볼 만한 의지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나마 학교를 드문드문 오고 있는 게 신기할 정도이지요.
우리가 주의해야 할 스몰 트라우마 중 하나는 부부싸움입니다. 아이에게는 부부싸움도 가정폭력이라는 말 들어보셨지요. 체감상으로 제가 만나온 아이들 10명 중 8명은 부모님이 어릴 때부터 싸우는 모습을 수시로 보며 자라 온 것 같습니다.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고 한 명이 다른 한 명을 때리고 밀치고 심지어는 식칼로 위협하는 경우를 목격하기도 했습니다(생각보다 식칼이 자주 등장하여 저도 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이 순간 아이들은 어떨까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무시무시한 공포와 무력감 속에 파묻히지 않을까요?
“엄마가 집을 떠나면 어떡하지? 엄마 아빠가 이혼하면 어떡하지? 그럼 나는 어떡해. 나 때문인가, 내가 말을 안 들어서, 내가 공부를 못해서 그런 거야, 너무 무서워...”
머릿속에 지진이 일어난 듯 정신을 차리기가 어렵습니다. 자신이 버려질까, 혼자 남겨질까 불안의 시간이 첩첩 쌓이게 됩니다. 그러다가 점점 위축되고 매사에 자신감도 떨어지고 친구들은 다들 잘 놀고 잘 지내는데 자신은 너무 형편없어 보입니다.
결국 삶에 대한 열정도 흐려져 흥미도 의욕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 와중에 공부에 집중이 잘 되기 만무하지요. 또래 관계는 또 어떻게 될까요. 그러면서 ‘이럴 거면 뭐 하러 날 낳았어, 내가 낳아달라고 했나, 차라리 낳지 말지.’ 이렇게 존재에 대한 거부감으로 똘똘 방어하며, 자신을 쉽게 받아주는 친구들, 담배, 게임, 도박, 인터넷 세상 등에 빠져들게 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부부싸움을 하지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가 아이의 마음을 얼마나 염두에 두고 있는지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지점입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난 후 어떻게 행동하셨나요?
전날 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하루를 시작하고 빨리 학교 가서 공부나 하라고 다그치며 일상을 보내야 했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에 사람의 마음과 관련해서 절대적인 답이나 공식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부모가 허구한 날 싸워도 아이가 마음이 건강하게 자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지난 4년간 고등학교에서 고객님들을 만나본 경험치로는... 글쎄요. 거의 희박하다고 봅니다.
부끄럽지만 저도 남편과 싸운 적이 많습니다. 자주 싸우지는 않았지만 한 번 싸우면 길게 싸워서 서로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집안 분위기를 냉랭하게 만들었지요. 싸우고 나면 구석에서 신세 한탄을 하며 훌쩍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이 서로 눈치 보게 만들었습니다. 늘 좋은 모습을 보이기만 할 수는 없지만 부모도 미숙하고 실수한다는 것을 이야기하며 화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아이들에게 사과와 용서를 구할 수 있다면 상처 난 마음도 조금씩 회복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이가 그 순간 경험하는 세상(어른들이 갈등을 해결하는 모습)이 모델링 될 수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서로를 죽일 듯이 으르렁대며 싸우면서 아이에게 ‘형제나 친구와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 먼저 양보해라’라고 얘기하는 것이 먹힐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막말, 그 놀라운 파급력에 대하여 -
다음으로 우리가 돌아볼 스몰 트라우마는 ‘막말’입니다.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는 대로 함부로 하거나 속되게 말함’이라고 정의되어 있네요. 아이들에게 상처로 남을 만한 막말들은 어떤 게 있을까요? 한 번 떠올려보겠습니다.
나가 죽어버려! / 도대체 왜 그래! / 네가 뭐가 힘들어, 나만큼 힘들어?!
너 장애인이야? / 네가 잘못했겠지. / 이거밖에 못하니? / 커서 뭐가 될래!
너는 인간쓰레기야! / 넌 쓸모없는 존재야!
대략 이 정도만 추려보겠습니다.
이 중에서 ‘내가 내뱉었거나’ 혹은 ‘내가 들어보았거나’에 해당되는 말이 있나요?
잠깐 화제를 전환해서 신비한 마법을 소개해드리겠습니다.
“(오른쪽 윗입술을 비틀어 위로 올리며 비아냥거리듯) 네가 하는 게 그렇지 뭐”
한번 따라 해 보시겠어요?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 어릴 때부터 엄마가 제게 자주 걸었던 주문입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여군장교가 되고 싶어 지원했다가 최종 면접에서 낙방을 했습니다. 당시 IMF 외환 위기여서 지금처럼 취업이 어려웠었는데, 몇 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고 어느 중소기업에서는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 일을 하다가 한 달 만에 그만두기도 했습니다. 가끔 아르바이트를 하긴 했지만, 집에서 뒹굴거리며 2년을 보냈습니다.
그 백수 시절에 엄마가 외삼촌 집에 다녀오시는 날이면 저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어야 했습니다.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해서 일찌감치 반도체 제조 대기업에 입사한 이종사촌 동생이 외삼촌 댁에 가전제품도 놓아드리고 용돈도 두둑이 드리는 상황이라 눈치를 챙겨야 했으니까요. 엄마는 공장에 다니며 저를 4년제 대학 졸업시키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는데 빈둥거리는 딸을 보면 속에서 천불이 나셨겠지요. 이제는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 지독한 마법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네가 하는 게 그렇지 뭐”
이 주문은 신비한 힘이 있어서 불확실한 일들을 반박할 수 없는 기정사실로 만들어주지요. ‘그래 맞아, 내가 하는 게 이 모양이지. 난 뭘 해도 안돼. 앞으로도 그럴 거야.’
그러면서 점점 더 용기 내지 못하고 더욱 좌절하도록 이끌어서 마치 놓쳐버린 두루마리 휴지처럼 그렇게 일이 술술(?) 흘러가게 한답니다. 아주 대단한 마술입니다.
언젠가 둘째 딸아이가 제가 저더러 “에휴...”라고 하는 게 너무 듣기 싫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엄마가 자신을 도저히 답이 없는 사람으로 대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면서 아주 정색을 하고 얘기하더군요. 인정하고 사과를 했지만 그러고 나서도 몇 번 더 “에휴...”를 남발했던 것 같습니다. 나름 상담공부 좀 했다고 아이들 마음을 잘 읽어주는 엄마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나는 심한 말을 안 한다고 착각하는 가식과 오만으로 가득 차 있었던 거지요.
이런 지나간 스몰 트라우마에 대해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요. 부모인 우리가 오랜 세월 굳어진 말과 행동을 바꾼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지요.
-'미안하다', 엄마의 그 한마디 -
또 한 번 화제 전환을 해보겠습니다.
상담하던 학생 중에 지금은 어엿한 직장인으로 성실하게 한 몫을 감당하고 있는 채희(가명)라는 친구가 있습니다. 1학년 때 입학해서 졸업하기까지 오랫동안 만났고 위클래스의 간식도 많이 축낸(?) 학생이지요. 사실 저는 나중에 이 친구가 이 험한 세상을 잘 살아갈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습니다. 짙은 그림자가 진 얼굴에 누가 봐도 우울감이 높아 보이는데, 게다가 어린 시절 엄마로부터 신체적·정서적·언어적 폭력을 오랫동안 받아오며 매사에 비뚤어진 태도로 성격이 형성되어, 남 탓만 하며 자기 인식 자체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3학년 1학기 즈음부터 채희의 표정이 온화하게 달라지는 것입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았더니 엄마가 자신에게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다는 기적 같은 얘기를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100번의 상담보다 부모의 ‘미안하다’는 한마디가 아이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1등 공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어머니는 동네에서도 성정이 쎄기로 아주 유명한 분이었는데 자신을 돌아보고 용기를 내셨다는 점이 지금 생각해도 매우 감동적으로 느껴집니다.
어떤 경우에는 엄마가 사과를 해도 아이의 마음에 1도 와닿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과를 하고 나서도 학대가 계속 지속되었을 수도 있고, 사과하는 태도도 자기 위주여서 진정성이 묻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아이들은 변검술을 쓰는 사람처럼 휙휙 달라지는 부모의 모습을 보고 가식적으로 여길 때가 많더군요. 그들의 마음이 풀어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신중히 고민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하루하루가 버거운 우리의 삶에 아이의 마음까지 세밀하게 살핀다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습니다. 아이들을 챙기며 다독이기에는 남아 있는 여유도 에너지도 부족합니다. 그런데 속된 말로 “뭣이 중한디!”라고 묻고 싶습니다. 지금 좀 더 살펴보고 아이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호미로 막을 것을 가래로 막지 않게 되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고 스몰이든 빅이든 내가 가했던 트라우마의 행동이나 말이 떠오른다면 한 번 고민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어떠했는지,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당장 아니어도 괜찮습니다. 내 마음속에 무언가 자리 잡고 있다면 언젠가 기회가 올 것입니다. 그때는 손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친구나 자녀나 배우자나 동료나.. 그들과의 더 나은 관계를 위해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성장이고 배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