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외로움을 모던하게 풀어내는
가끔 좋은 단편영화들을 보면 좋은 단편소설을 읽은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추상적이라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과하지 않은 기승전결 구조에 흘리듯 보여주는 디테일들이 주는 인상, 너무 심하게 강조하지 않는 메시지를 던져줄 때 그런 느낌을 받는데 <재경>은 그런 영화였다.
홀로 넓은 아파트에서 살고 있는 재경. 재경은 공황장애에 불면증까지 앓고 있다. 그런 재경의 집에 염치를 모르는 아는 동생 성우와 남자 친구와 싸운 친동생 지원이 찾아오고, 셋은 불편한 동거를 시작한다. 성우는 하루 종일 잠만 자고, 지원은 아침마다 클라리넷을 불어 소음을 일으키고 재경은 그런 둘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둘이 집으로 들어오고 나서는 재경에게서 성우와 지원으로 포커스가 넘어온다. 둘은 처음 동물들이 자리싸움하듯 티격태격한다. 그러다 우연히 베란다에서 함께 빨래를 널다가 자동으로 잠기는 창 때문에 갇히게 되고, 그 안에서 재경을 기다리며 서로 개인적인 이야기들을 하며 친해진다. 그렇게 서로에게 정이 드나 싶지만 성우는 집을 계약하며, 지원은 남자 친구와 화해하며 하나씩 재경의 집을 떠난다. 그들이 떠나고 아파트 계단에서 떨어져 자살까지 생각했던 재경은 무언가 변한 듯 보인다. 베란다에서 홀로 빨래를 널던 그에게 성우의 코 고는 소리와 지원이 클라리넷을 부는 환청이 들리고, 그는 스스로 문을 닫아 베란다에 갇힌다.
이 영화에서 재밌는 지점은, 서브 캐릭터인 성우 지원의 속마음은 어느 정도 보여주면서, 재경의 속마음은 단독샷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에 대한 정보들은 성우와 지원의 대화를 통해서 오히려 더 디테일하게 알게 된다. 그는 두 사람에게서 나름의 정을 느끼지만, 성우에게는 부동산을 돌아다니라고 압박을, 지원의 남자 친구에게 직접 연락해서 그녀를 데려가게 하고 자의적으로 혼자가 된 후, 그들의 흔적들이 보이자 홀로 베란다로 가 스스로를 단절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세상 일들과 파혼 때문에 생긴 상처 때문일까. 외롭지 않을 수 있을만한 관계들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더 고립시키는 그의 성격은 현대인들의 한 단상을 보여주는 것 같다.
물론 이 영화의 재밌는 지점은 이런 단상뿐 아니라 세 캐릭터의 현실적인 상황들과 각자의 고민, 또 서로 티격태격함에서 오는 리얼한 연기와 그 무드에서 오는 러블리함이 있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지점은 베란다에 갇혔던 성우가 옆집 개소리를 들으며 이건 '닥스훈트'다라고 자만하고 나서 집을 떠날 때 마주하는 진돗개의 뒷모습이다. 흘리듯 지나갈법한 디테일들을 한컷으로 인해 단순한 코미디성을 떠나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을만한 여지를 남겨두는 재미랄까. 그리고 근사하게 찍어둔 여러 인서트들은 영화의 빈 공간에 적절하게 들어가 풍미를 더하는 느낌이다.
영화를 다 본 후 찾아보니 감독은 영화 속 '성우'였고, 여러 단편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베테랑이셨다. 깊이가 묻어날만한 영화는 괜히 나오는 게 아닌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