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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May 11. 2023

박찬국 지음.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하이데거 

   

‘하이데거’라는 철학자의 책을 한 번 읽었던 적이 있다. 그 후 그의 책을 읽고 싶지 않았다. 왜, 어려워서 책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은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에 이끌려 읽었다.   

  

책은 ‘고향 상실의 시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우상 숭배’, ‘우리의 삶은 왜 이토록 공허한가’, ‘근본기분이란 무엇인가’, ‘장미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 ‘인간은 왜 불안을 느끼는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언어란 무엇인가’, ‘건축의 본질과 시적 사유’, ‘자연은 위대한 사원이다’ 등 10장으로 되어있다. 이 책 한 권이면 인간의 모든 고민은 해결될 것 같다.     


하이데거는 20세기 이후 지성계에 가장 큰 족적을 남긴 사상가 중 한 명이다. 


저자는 “20세기의 거의 모든 철학적 조류, 실존철학과 현상학,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데리다. 푸코, 들뢰즈의 후기구조주의, 마르쿠제와 바버마스의 비판이론, 아렌트의 정치철학, 철학적인간학, 언어철학, 과학철학 등에서 하이데거 철학의 흔적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문학과 문예비평, 심리학, 신학, 생태학 등에도 하이데거가 미친 영항은 무시할 수 없다.”라고 한다.     


하이데거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손은 원숭이의 손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손은 동물의 손과 달리 사물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시인으로 산다는 것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라고 말했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고향 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고향이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는 ‘사람이 태어나서 자란 곳’이겠지만, 이때 ‘고향’은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냉기가 흐르는 세상과 달리 그곳에는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이 존재한다. 고향에는 사람들 사이에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에 사랑과 정이 가득하다. 상대방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기뻐하는 사랑과 정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현대는 종교와 가장 무관한 시대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가장 종교적인 시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과학기술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현상을 가리켜 에리히 프롬은 ‘산업종교’라고 불렀다. 기독교든 산업종교든 어떤 하나의 종교에 빠진 인간을 이성적으로 설득함으로써 그 종교를 포기하게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특정 종교에 대한 믿음은 이성적인 논리와 설득으로 극복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에리히 프롬은 『소유냐 존재냐』라는 책에서 인간을 비롯한 살이 있는 생명들보다는 정교하고 깔끔한 인공물에 더 의지하고 그것들을 더 좋아하는 성향을 ‘네크로필리아’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 부인이 아플 때보다도 자동차가 부서졌을 때 더 안타까워하는 현대인들의 물질주의적인 성향을 말한다. 하이데거는 이 시대를 “노동과 향락으로만 이루어진 삶은 어떠한 무게와 존엄도 갖지 않는 공허한 무에 불과한 위기의 시대”라고 한다. 현대인들은 이 시대를 위기의 시대로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만들어낸 물건들에 도취해 있을 뿐이다. 따라서 각성하고 새로운 인간으로 변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하이데거는 정보 없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가능하지만, 시 없이 인간답게 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시는 잃어버린 채 정보를 수집하고 처리하면서 자신의 생존을 유지하고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에 몰두하는 인간은 로봇과 다를 바 없다. 기계가 많은 면에서 인간을 압도한 지 이미 오래되었다. 인간의 걸음이 아무리 빨라도 자동차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우월한 존재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인공지능이 기계인 한 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감정이나 의욕을 갖는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인 살이 항상 타인과의 비교의식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비교의식에 사로잡혀 있을 때 우리는 타인과 비교되는 자기 자신을 강하게 의식한다. 하이데거는 비교의식이 지배하는 삶에서 우리는 자기 삶의 주체로 사는 것이 아니라, 익명의 타인들에게 예속된 채 그들의 자의와 변덕에 따라 휘둘리고 있다. 이때의 타인들이란 어떤 특정 인물들이 아닌 사회, 즉 익명의 ‘세상 사람’이다. 우리는 ‘세상 사람’의 삶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모든 비교가 만들어내는 마음이 시끄러움에서 벗어나 고요한 평정을 되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누구나 죽는다. 하지만 내가 언제 어떻게 죽을지 모른다는 사실은 ‘불안’이라는 기분으로 찾아와 일상적인 삶의 자명성을 파괴한다. 그제야 우리는 고독한 단독자로서의 자신과 마주한다. 죽음에 대한 불안이 없다면, 의미로 충만한 삶고 있을 수 없다.     


서산대사가 임종할 때 남긴 시에는 “천 가지 계획과 만 가지 생각이 불타는 화로 위의 한 점 설이로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천 가지 계획을 세우고 수만 가지 생각을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타는 화로 위에 떨어지는 눈 한 송이에 불과하다. 화로 위에 눈 한 송이가 떨어지면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다. 우리는 그런 눈 한 송이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인간은 이렇게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덧없는 것으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동물이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무이한 존재로서의 나의 죽음이고, 이 사실은 어느 누구도 나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는 데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불안’이란 기분은 허무감 내지 무상감과 같은 느낌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음을 진지하게 생각할 때 우리는 그동안 집착해온 돈, 명예, 승진 등의 모든 세간적 가치를 무의미하고 덧없는 것으로 느끼게 된다. 이에 반해 다른 사람들에게 죽음은 ‘막연한 두려움’ 속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것으로 나타날 뿐이다.    

  

하이데거는 삶을 짐으로 여길 수 있는 존재는 우리 인간뿐이라고 한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사람들의 얼굴에는 인생의 무게가 서려 있다. 대부분 굳어 있거나 어두운 편이다. 인간의 우주의 끝은 물론 아직 오지 않은 무한한 미래와 이미 지나가버린 무한한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 가능하다.      


나이가 들면 누구나 철학자가 되는 것 같다. 젊은 때 보다 죽음이 한 발자국 가까이 와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집중이 되는 부분도 ‘죽음’에 관한 부분이었다.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알기 쉽게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오랜만에 깊은 생각을 해봤다.     


책 소개

박찬국 지음. 『삶은 왜 짐이 되었는가』 2017.09.13. ㈜북이십일 21세기북스. 264쪽. 16,000원. 

    

박찬국. 서울대학교 철학과 졸.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철학과 교수. 저서. 『그대 자신이 되어라-해체와 창조의 철학자 니체』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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