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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Jul 09. 2024

『나이듦의 철학』 제임스 힐먼 지음

지속하는 삶을 위한 성격의 힘

나이듦은 우연이 아니다. 나이 듦은 인간으로 사는 한 필연이다. 영혼이 의도하는 바다. 노화는 애초에 생리학적으로 정해진 일이다. 그러나 인생은 자손 생산의 소임을 다한 후에도, 근력이 떨어지고 감각 기능이 둔해져도 곤혹스러우리만치 오래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나이 듦을 영예롭게 여기고 노년을 그에 합당한 지성으로 다루는 창의적 발상이 필요하다.   

  

나이 듦은 무슨 쓸모가 있을까? 나이 듦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이는 자꾸 먹는다. 그런데 나는 내 본연의 모습으로 늙어가고 있는 걸까? 노화와 성격은 한데 결부되어 있다. 인생의 정상적인 흐름에서, 노화는 사망으로 종결된다. 모든 노화가 사망으로 종결된다고 해서 사망이 노화의 전적인 목표일까? 영혼은 육신을 떠나기 전에 ‘제대로’ 나이를 먹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노화를 생물학적 변화 못지않게 아름다움이 변화로 생각할 수 있다. 노인은 생물학적 삶이 상상과 예술로 옮겨져 전시된 이미지 같다. 노인은 기억할 만한 조상들의 나타남, 문명이라는 연극 속의 배역, 저마다 독특하고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다. 나이 듦은 예술 형식의 일종일까?     


신체 기관이나 기능만 나이를 먹는 게 아니라 사람의 본성 전체가, 오래전에 이미 수립되었고 지금의 모습에 도달한 개인 자체가, 나이를 먹는다. 성격은 우리의 얼굴, 습관, 우정, 기벽, 야망의 수준과 그에 따른 이력과 결함까지도 형성해 왔다. 성격은 우리가 뭔가를 주거나 받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성격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자녀들에게 영향을 준다.      


누구에게나 노년은 처음이지만 우리가 맨 처음 노년을 마주한 사람은 아니다. 인류는 언제나 노년을 겪어왔으매 옛사람들이 노년을 받아들였던 방식에 기대어 보면 어떨까? 인간이 나이가 들수록 현명해지고, 판단은 냉철해지고, 생식기에 일어나는 변화도 차라리 해방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다. 나이를 먹으면서 표면으로 드러나는 태도들이 본성의 발현이 아니라 그냥 나이 듦의 결과라고 믿어버리면 한결 수월하게 나이를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왜 늙었는가?”라는 질문에 흔히 “죽을 날이 가까워져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실제로 내가 늙어가면서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바는 죽음이 아니라 성격이다. 죽음은 사유의 주제가 아니다. 그 이유는 죽음이 사유에 종속되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은 사유 너머에 있고, 사유의 방법들로 다다를 수 없다. 논리, 증명, 실험, 이 모든 것으로도 답이 안 나온다. 죽음에는 상징주의, 영성주의, 형이상학적 사색이 통할 뿐 심리학이나 현상학이 없다. 죽음에 대해서 뭐라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유의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자유인은 그 어떤 것보다 죽음에 대해서 생각이 없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했다.     


인생의 말년은 더없이 가치 있는 시간이다. 살아온 날들을 돌아보고, 바로잡아야 할 것을 바로잡고, 우주론적 사색에 잠기고, 기억을 이야기로 엮어내고, 세상의 이미지를 감각으로 향유하며, 유령이나 조상과 연결될 수 있는 귀한 시간이다.      


나이가 들면 굳이 뭔가를 하지 않더라도 특이한 삶의 확장이 일어난다. 쉰 살이 넘어가면 우리의 생각, 감정, 기억이 자녀보다는 부모의 편에 더 비슷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일흔 살이 넘어가면 우리는 살아 있는 손자들보다 진즉에 저세상으로 떠난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더 가까워진다. 어쩌다 가끔 들르는 손자들은 우주선에서 튀어나온 외계인처럼 낯설기만 하다. 나이 든 이들은 영혼을 자기 안으로 거둬들임으로써 더욱더 크게 키우는 것 같다. 내면성이 확장되면 노년의 작은 방으로 좀 더 기꺼이 들어가고 세상에서 자리를 덜 차지하게 된다.     


마지막 기회, 마지막 순간, 마지막 판, 야구의 마지막 회, 마지막 출구, 마지막 시도, 마지막 의식, 최후의 만찬, 마지막 나날, 최후의 심판, 마지막 말, 마지막 숨, 마지막 단어, 마지막 웃음, 마지막 춤, 마지막 여름 장미, 마지막 인사, 이 얼마나 묵직한 단어인가! 어째서 이 단어가 붙으면 모든 말이 이토록 중요해지는가? 연속적인 사건들 중 가장 마지막에 온 것이 그 전체를 더는 변경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고 종지부를 찍기 때문이다. 운명의 반항이랄까. 결혼, 연애, 동거를 이루는 사건들은 마지막 장면에 다 응축되어 있다.     


반복은 노년의 주특기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미 했던 말을 거의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또 한다. 반복은 노년의 징후이지만 노인들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노인병학은 반복을 단기 기억 능력의 쇠퇴와 결부시킨다. 자기가 똑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이미, 심지어 여러 번 이야기했다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이다. 반복은 노인과 아이를 하나로 묶는다. 그 둘은 반복의 흥을 안다. 반복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야기를 전달하는 구전 전통에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조상들의 구전 지식은 반복을 통하여 살아 숨 쉬고 제대로 남을 수 있다.      


무덤을 뜻하는 단어 ‘grave’에는 네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중력 gravity’, 모든 것을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내리는 신비로운 물리적 힘. 둘째, ‘진중한 gravitas’, 셋째, ‘무덤 grave’, 육신의 마지막 안식처인 묘지. 넷째, ‘임신한 graved’, “아이를 가져서 몸이 무거워”라고 말한다. 이 네 가지 의미도 서로 섞일 수 있기때문에 노년의 염려는 죽음 이후의 무덤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무게 있는 진지함과 지구의 중심으로 끌어내리는 힘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아래로 끌어내리는 힘은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나이 든 사람들은 왜? 밤잠이 없고 낮잠을 잘까. 나이가 들수록 적정 수면 시간은 여덟 시간에서 여섯 시간, 경우에 따라서는 다섯 시간까지 줄어든다. 점점 더 밤이 우리의 시간이 된다. 밤의 여신 닉스는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를 자신의 추종자로 삼는다. 밤에 깨어 있다는 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하여 어두운 눈이 열린다는 것이다. 오직 밤에만 찾아오기에 잠을 자지 않아야만 들을 수 있을 듯한 경고, 통찰, 설득에 귀가 예민해진다.      


나이가 드니 추운 날에는 콧물이 흐르고 눈물이 나는데 정작 콧속이나 안구는 찢어질 것처럼 건조하다. 건조한 두피와 살갗도 골칫거리다. 체모와 각피가 푸석푸석해지고 땀이 예전처럼 잘 나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의학은 젊음은 촉촉하고 나이가 들수록 그러한 기본 기질의 상극으로 나아가게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더운 것은 찬 것으로, 촉촉한 것은 마른 것으로 변한다. 노인들에게는 증기욕이 특히 좋고 송아지고기나 토끼 고기처럼 육질이 부드럽고 촉촉한 고기 혹은 스튜, 커스터드, 수프 같은 유동식이 알맞다고 한다.    

 

나이 든 사람은 기억을 장기적인 것과 단기적인 것으로 구분하는 능력이 발달한다. 장기 기억이 발전하는 동안 단기 기억은 주저앉는다. 70년 전, 소녀 시절 친구들이 입었던 원피스들은 또렷이 기어나는데 내가 방금 전에 어딘가에 두었던 안경은 도저히 못 찾는다. 노년에는 과거의 기억들이 좀 더 기분 좋은 것이 된다. 열렬한 투쟁, 질시 어린 경쟁, 심지어 배신조차도 새로운 가치를 띠고 돌아온다. 그 기억들은 그리 상처가 되지 않는다. 곰곰히 생각해 보면 재미있기까지 하다. 오래 앓은 병, 하지 않았어야 했던 결혼, 온갖 치졸하고 가혹한 처사들이 이제는 독하게 느껴지지 않고 무엇을 위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과거의 어두운 날들이 노년의 회상 속에서 밝아지고 가벼워지는가? 영혼이 지고 있던 무게를 놓아버리고 높이 날아갈 준비를 한다는 미묘한 암시인가. 망각은 노년의 경이, 어쩌면 용서의 가장 진실한 형태이자 축복일지도 모른다.  

   

노인들이 화를 잘 내는 이유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는 세포의 분노 때문일까, 아니면 어서 떠나고 싶은데 그럴 수 없어서 조급함이 도진 탓일까. 성급함은 노년의 속성이다. 노년에는 딱히 도발하는 것이 없는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리고 이 화는 참을성으로 조절되지 않는다. 온화함을 유지하는 참을성과 쉽사리 폭발하는 짜증이 나란히 간다. 참을성과 조급증은 노년에 속하는 대립적인 두 힘으로 이루어진 한 조다. 나이가 들면 인간 본성의 오만 가지 모순들이 불거진다.      


몸은 관 속의 시신이 되기 전에 영혼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 같다. 몸이 말을 안 듣고, 주저앉고,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한다. 신체의 부분들이 우리가 키우는 식물이나 동물처럼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어떻게 해줘야 자기에게 최고로 잘해주는 건지 알려준다.      


남겨진다는 것. 이 가능성이 친밀한 결합, 특히 부부로 만나 가장 가까운 동지가 된 관계에는 늘 도사리고 있다. 자기만 남는다, 남겨진다, 상대가 먼저 간다, 자기가 혼자가 된다는 상상은 결혼의 첫 순간부터 들어와 있다. 혼인 서약에 나타나는 병, 버림, 죽음, 떠나다 같은 단어들만 봐도 그렇다. 결합이 있으면 분리, 기만, 버림, 이혼의 가능성이 있다. 함께 사는 세월이 길어질수록 더욱 두려워지는, 완전히 성인의 조건이다.    

 

노년에 관해 냉철하게 파헤친 책이다. 읽어보고 ‘꼰대’가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책 소개     

『나이듦의 철학』 제임스 힐먼 지음. 이세진 옮김. 2022.11.01. 청미출판사. 352쪽. 20,000원.

     

제임스 힐먼(~2011)

 심리학자, 강연자, 융학파 정신분석가, 스위스 융 연구소 학과장. 유럽에서 30년 거주한 후 코네티컷에서 여생을 보내고 2011년 타계했다. 저서.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등.     


이세진. 서강대학교 철학과 졸업. 같은 대학원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했다. 전문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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