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니』 권비영 장편소설

「여성들의 존재 양식에 대한 서사」

by 안서조

이 책의 부제는 「여성들의 존재 양식에 대한 서사」이다.


소설은 ‘존재하는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나는 어머니의 자궁을 빌려 태어났다. 그건 오래도록 갚아야 할 빚이며 동시에 축복으로 여겨도 좋을 일이었다. 어머니는 나를 낳고 미역국을 먹었고 출산 휴가를 내어 석 달 동안 쉬었다. 내가 아들로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 가장 슬퍼한 사람은 할머니였고 둘째 딸이 태어난 것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로 시작한다.


이 소설은 할머니(장길주), 어머니(이연숙), 화자(황윤서) 여자 3대에 걸친 이야기다. 할머니 장길주는 17세에 팔려가 듯 황씨 집안에 며느리가 되었다. 생활력 없는 남편과 시부모, 시동생들을 부양하느라 험하게 고생한다. 그러나 항상 죄인의 심정으로 살아간다. 딸만 여섯을 낳고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아들 낳아줄 여자를 들이게 한다. 그런 와중에 같이 임신하고 마침내 아들 황구남을 낳는다. 새로 들어온 여자는 딸을 낳는다.


어머니 이연숙을 할머니가 낳은 금지옥엽 황구남을 남편으로 만나 살아간다. 연숙은 영어 교사이다. 첫딸을 낳을 때 만해도 시어머니 장길주 여사가 아들에 대한 희망을 버리지 않고 며느리에게 보약을 먹인다. 그러나 둘째도 딸이다. 막내딸이 태어나자, 남편은 이제 아이는 끝이라고 선언한다.


화자 황윤서는 황구남과 이연숙 사이에 둘째 딸로 태어난다. 소설가 지망생으로 등단하려고 응모하지만, 번번이 낙방이다. 윤서의 동생 윤미는 간호사이다. 어느 날 가족들에게 임신했다고 선언한다. 결혼은 안 하고 혼자 아이를 낳아서 키운다고 말하고 가출한다. 애 아빠가 누구냐는 가족들의 물음에 함구한다.

황구남과 이연숙은 직장에서 정년퇴직하고 둘이 합의로 ‘해혼’ 한다. 결혼생활에서 서로에게 해방한다는 의미다. 해혼하고 황구남과 이연숙은 어머니 장길주에게 ‘해혼’ 사실을 통보하고 각자 집을 나간다. 황구남은 국내 여행을 가고 이연숙은 오피스텔을 빌어 독립한다. 이연숙은 엄마가 요양원에 있다. 정신 줄을 놓아 연숙이 면회 가도 알아보지 못한다. 연숙은 둘째 딸 윤서에게 이메일 편지를 쓴다. 프랑스 파리, 독일 베를린, 이탈리아에 여행 중인 것처럼. 하지만 요양원에 있는 엄마 때문에 여행 가지 못하고 상상 여행을 하면서 딸에게 이메일을 보내는 것이다.


소설은 정길주를 중심으로 전개하면서 친정 오빠와 막내 여동생이 미국에 입양되었다가 한국에 와서 언니를 찾는다는 줄거리로 전개된다. 화자의 여동생이 임신하게 된 남자를 찾아내어 만나는 과정으로 끝난다.


책 중에서

담담하게 내뱉는 정원의 말에 날이 서 있다. 유부남과의 사랑은 걸림돌이 많았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눈이 없다.


우리는 말없이 술을 마셨고, 인생에 대해 아무런 결론도 내릴 수 없는 쓸쓸한 시간을 죽였다. 창밖으로 기어드는 어둠이 푸르스름했다.


이탈리아는 언제나 꿈속의 땅이었지, 늘 오고 싶던 곳, 그러나 올 수 없었던 곳, 그런데 나는 지금 그, 땅에 와 있어. 살아가는 동안 무언가를 음미하면서 느끼는 일은 쉽지 않아. 우리는 늘 어딘가로 정신없이 가고 있었고, 뭔가를 정신없이 하고 있었고, 누군가와의 관계를 생각하며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살고 있었지.

지금 나는 아주 홀가분해. 아주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홀로 부유하고 있어. 마치 지구를 떠나서 지구를 내려다보는 듯이. 붙박여 있던 내 자리를 떠나 생각해 보는 우리의 삶은 때로 너무나 허망하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요즈음이다. 왜 그렇게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도 그렇고, 틀을 벗어나면 낭떠러지인 듯이 살아온 삶도 측은하게 느껴지네. 돌아보면 삶이란, 늘 축축하고 서글픈 부문이 많지. 그 축축함에 대해 우리가 느끼는 감정이란 눈물이나 우울일 수도 있지만, 축축한 생의 그 어디쯤에서 안온한 생각의 싹이 돋아날 수도 있는 것인지. 하지만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며 살고 있지.


산다는 건 비행이야.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모르고 하늘을 배회할 때, 누구든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고 있는 자는 없을 거다. 날아가고 있기는 하되, 어디로 날아가는지도 모르게, 그저 날아가고 있는, 그러다 어둠이 내리면 우리는 어딘가로 내려앉지. 그곳은 운이 좋으면 안락하고 따뜻한 장소일 수 있지만, 운이 나쁘면 축축한 습지이거나 쉴 곳 없는 사막일 수도 있지. 그 자리, 내게 어떤 자리가 허락될지 모르는 일이지만 사는 동안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은 그리 많지 않다고 생각해.


나는 이제부터 나만을 위한 삶을 살기로 했다. 내가 뿌린 씨는 알맞게 거두었으니 내 인생을 완성하는 게 내 삶을 마무리하는 거라 여긴다.


그 누구도 보살피려 하지 않는 늙은이들을 보살펴 준다는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다. 남긴 것 없이 늙은 몸은 무용지물이다. 아니 버거운 짐이다. 엄마만 해도 그렇다. 살집이라고는 없이 비쩍 마른 몸뚱이로, 초점도 없이 아무 데나 멀거니 쳐다보는 형상은 허깨비와 다를 바 없다. 가끔씩 오락가락하는 정신도 그렇다. 사람을 앞에 두고도 그 사람을 찾는 걸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에게 육체란 무엇일까. 또 그 몸속을 차지하고 있는 영혼이란 건 뭘까?


인생은 순간순간마다 일어나는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구슬에 꿰듯 기억 속에 꿰어 소중하게 갈무리하는 일로 대부분의 시간을 허비한다. 그것이 사랑이거나, 혹은 애증이거나, 그도 아닌 서늘한 기억일지라도.


여든이라는 나이가 낯설다. 옛날 같으면 땅속에서 썩어 문드러져 흙이 되고도 남았을 세월이다. 그저 살아있는 것이 고맙기는 하나 하루하루 견디어 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다.


인생 백세시대! 징그럽다. 살아온 세월이 징글징글하다. 여필종부, 여자는 세 남자를 따라야 한다든가. 아버지, 남편, .아들. 그게 법도라, 길이라, 입 다물고 살아온 세월이다. 죽은 듯 살아온 세월이다. 아니 죽지 않으려고, 살아남으려고, 이를 악물고 살아온 세월이다.


심각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되었다. 그래야 덜 쓸쓸할 것이다. 말 한마디하고 한 잔 마시고, 또 한마디하고 한 잔 마시고, 술은 술술 잘 넘어갔다. 빗소리는 점점 크게 들려오고 그들의 말소리도 점점 커졌다.


책 소개

『엄니』 권비영 지음. 2019.06.20. 도서출판 가쎄. 364쪽 14,500원.

권비영. 2005년 첫 창작집 『그 겨울의 우화』를 발표했다. 『덕혜옹주』, 『은주』, 『몽화』 등 장편소설과 중, 단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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