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을 다시 묻는다』

「서울대학교 인문학 공동연구 총서 01」

by 안서조

이 책은 「서울대학교 인문학 공동연구 총서 01」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하는 물음은 어느 시대에서나 가장 중요한 질문이었지만, 21세기에는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인공지능이 어떤 부분에서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넘게 되었고, 유전공학은 인간의 독특한 요소로 생각되었던 영혼, 감정 그리고 자유의지와 같은 부분들이 물질적 알고리듬의 결과임을 보여 주고 있다. 인간과 기계의 차이라고 할 부분을 점점 더 찾기 어렵게 되면서 다시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묻게 되었다.

이 책에서는 인간에 대한 질문을 크게 네 영역으로 나누었다. ‘인간의 정체성’, ‘인간의 영혼과 의식’, ‘인간의 욕망과 좌절’, ‘인간의 본성과 자격’이다.


인간의 정체성에 관해서, 나수호 교수는 인공지능의 발달사를 설명한다. 이영목 교수는 18세기 프랑스 학자들은 동물을 기계로 여겼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신이 잘 만든 기계 정도로 생각했다. 지금 만들어지고 있는 인공지능이나 로봇이 2백여 년 전부터 관심을 끌었다. 인간과 동물, 인간과 인간 사이를 나누어 볼 때 문제가 되는 부분은 생명이다. 고장이라는 ‘기계의 사망’에 인간이 공감하는 상황도 존재하지만, 그것은 현실 문제는 아니다.


불교가 살생을 금지하는 것은 인간이라도 억만 겁의 윤회 과정에서 동물로 태어날 수 있고 동물도 또한 인간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은 전생 업의 결과이고, 현생의 삶의 결과로 동물로 태어날 수 있다. 내가 동물이 되고 동물이 사람이 되어 태어나는 마당에 어떻게 마음 편히 동족을 죽이고 먹을 수 있겠는가.


진리 앞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불교의 진보적 사상도 윤회와 연결 지어 보면 자연스러운 논리가 된다. 지금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전생에는 동물이었을 수 있고 후생에 동물이 될 수도 있으니, 어떻게 낮은 사람을 차별하며 동물을 함부로 대할 수 있겠는가. 덕업을 쌓고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최선이라 할 수 있다.


최윤영 교수는 18세기부터 20세기까지 독일에서 유대인을 대하는 사상과 태도가 크게 요동쳤는데, 그전에 선입견과 편견으로 차별받던 유대인들이 18세기 계몽주의와 프랑스 대혁명의 영향으로 시민권을 부여받았지만, 새로운 사상은 종전의 편견을 넘지 못하고 잠재된 차별과 혐오가 히틀러에 의해 반 유대인의 정치 이념과 정책으로 전면화됐다. 유대인은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인식되어 생명권까지 박탈당해 제노사이드에 이르렀다.

차별과 혐오의 인간관 극단을 보여 준 이 사건은 특이한 예가 아니라 ‘인종 청소’ 등의 이름으로 세계 도처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에서도 동족을 상대로 한 대규모 학살로 나타났다. 소설가 김정한은 6·25전쟁 중 한 학살의 현장에서 동네 사람이 모두 죽고 남은 자리에 개 한 마리가 살아남은 젖먹이에게 젖을 물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 ‘차라리 개가 사람보다 낫다’라고 절규했다.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고 증오하며 적대하고 학살하는 일은 아직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간의 영혼과 의식’에 관해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사람들의 관심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현실에서 종종 신비주의적 체험이 보고 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무신론자나 유물론자들은 신비 체험을 인간의 뇌가 만들어 내는 생물학적 현상, 뇌의 오작동, 주관적 기대나 망상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체험 당사자들은 그 현현 자체의 실제성을 확신한다.


인간의 가시권을 벗어난 어떤 초월적 세계와 존재가 있다는 믿음은 고대부터 있었다. 김헌 교수는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의 위상을 정리했다. 인간 세계를 넘어선 초월 세계가 실재하건 그렇지 않건, 인간에게 육체를 넘어선 영혼이 있는지, 여부에 상관없이 현실에서 인간 세계 너머의 상상을 가장 빈번하고 분명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꿈이다.


꿈은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인간의 이상 지향과 연결되어 있다. 이상을 지향하는 인간은 한 끼 식사로 배고픔을 면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며, 때로는 하루 이틀을 굶기도 하고 심지어 죽음을 불사하기도 한다. 어쩌면 꿈과 이상이 있기에 인간이 동물과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과 좌절’에 관해서,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먹고 사는 일이다. 인간은 동물과 달리 배부르다고 해서 멈추는 일이 없다. 부자는 자기가 평생 먹고살 정도의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어도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온갖 일을 한다. 인간의 무한한 욕망을 결국 다른 인간과 충돌하게 되고, 그것은 사회적 화근이 된다.


중세에서 근대까지 서양 사회에서 돈에 대한 관념이 어떻게 바뀌어 왔는가. 서양 사회의 도덕적 기반인 기독교는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했다. 또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다. 게으르고 타락한 가난한 사람도 있고, 성실하고 신실한 부자도 있다. 교회가 부자들에게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돈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부정적 태도를 취했지만, 그 순기능까지 무시할 수 없었다.


부와 짝을 이루는 인간의 중요한 욕망이 ‘성性’이다. 성 또한 기성의 도덕이나 종교에서 절제를 요구받는 금기의 대상이었다. 미술사의 영역에서 서양의 기독교가 인간의 나체를 어떻게 대했는지 엘 그레코의 종교화를 통해 볼 수 있다. 16~17세기 이탈리아와 스페인에서 활동한 엘 그레코는 종교화에 나체와 반나체의 인물을 많이 그려 넣었는데, 심지어 예수 형상까지 나체로 표현하여 어떤 명에서는 불경스럽게 보이게도 했다. 나체를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화가와 감상자의 성적 욕망의 또 다른 출로일 수 있다.


돈과 성이라는 즉물적 욕망을 넘어선 곳에,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의 최종 지향점인 행복이 있다. 애덤 스미스는 돈과 건강이 행복의 필수 요건이라고 했다. 유명한 뒤러의 판화 〈멜랑콜리아 1〉에는 우수에 찬 천사 옆에 에로스가 그려져 있다. 우울과 분노는 불행감의 한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한 사랑을 상징하는 에로스가 그려져 있는 것은 멜랑콜리가 삶을 향한 뜨거운 사랑과 얽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본성과 자격’에 관해서, 본성의 핵심적 지점은 도덕성과 창조성이며, 자격은 법적 주체를 다룬다. 맹자는 어린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본다면 누구나 깜짝 놀라며 측은해하지 않겠느냐며, 여기에서 인간의 근본적 도덕성을 찾을 수 있다.라고 성선설을 주장했다.


도덕성의 본질에 관해 자발성이나 자유의지가 보이지 않는 행위나 존재에게 도덕성을 묻기 어렵다. 도덕의 근본으로 이타주의 태도를 들 수 있다. 이타주의 핵심은 타인이 나와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는 생각이 자리한다. 이는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도 수단이 아니라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


인간이 법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은 공동체 내에서 적법한 권리를 가지는 것이다. 흔히 모든 인간이 법적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이런 생각은 실상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현실적으로 거기에 속하지 못한 사람도 적지 않다. 난민이나 망명자가 그렇거니와 나치 치하의 유대인처럼 법적 지위를 박탈당한 때도 있다.


한나 아렌트는 “전체주의 지배로 향하는 첫걸음은 바로 사람에게서 법적 주체성을 살해하는 것이다.”라고 마랬다. 법적 주체는 특정한 사회, 저치 체제 속에서 늘 위협 받아왔다. 현재 대한민국의 모든 사람이 법 앞에서 평등한지 의문이 생긴다.


책 소개

『인간을 다시 묻는다』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2020.06.30.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99쪽.

편집 책임

정병설.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한국 고전문학, 특히 조선시대 소설이 주전공이다. 저서, 『조선시대 소설의 생산과 유통』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