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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Jul 03. 2022

신도현, 윤나루 공저, ‘말의 내공’

-사람을 끌어당기는 동서양 고전의 화술-을 읽고

이 책은 ‘말 한마디에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 모두의 삶이 참여한다.’라는 작가의 생각을 썼다. 

당장의 화술 향상보다는 기존의 언어생활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길을 모색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말에도 내공이 있다. 내가 하는 말이 상대방에게 정확하게 잘 전달되고, 

공감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결론은 다음과 같다.

상대를 진심으로 생각하고 그가 변하길 갈망하는 사람은 영리하고 부드러운 말하기를 쓴다. 

나의 말하기가 자신을 과시하는 용도로 쓰였다면 나의 마음을 가꾸어야 하고, 

진심을 담은 것인데도 냉정한 말하기를 구사하고 있었다면 말투를 가다듬어야 한다.     


대화란 말의 나눔 이전에 마음과 마음의 나눔이다. 말은 단지 도구다. 말도 중요하지만,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한 이유다. 그래서 진의와 다른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진심의 언어 ‘내면의 목소리’를 낼 때 타인 역시 나에게 바깥의 귀를 지나 내면의 귀를 열어 준다.      


신뢰를 깨기 싫어서 어쩔 수 없이 자신이 한 말을 지키는 사람은 자유인이 아니다. 자유인은 말과 책임을 구분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나의 뜻이기에 말하고 실천할 따름이다. 자유인은 자기 내면의 목소리를 발화하고 그것을 당연히 실천한다. 하고픈 말을 하고 지키고 싶은 말을 지키니 자유롭다.     


말의 내용과 형식은 하나가 아니다. 진정성과 가치를 담고도 표현이 서툰 사람이 있고, 말은 유려해도 정작 그 안은 비어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내용과 형식을 하나로 생각한다. 말이 예의 바르면 마음 역시 공손하리라 생각하고, 말이 서투르면 그 내용 또한 빈약할 것이라고 넘겨짚는 것이다.     


이 책의 주요 내용은 


말하기 위해서는 말을 준비하고 익히는 단계로 ‘수양’ ‘관점’ ‘지성’ ‘창의성’ ‘경청’에서 듣기, ‘질문’에서 말하기를 생각한다. ‘화법’에서 더 구체적인 말하기 원칙을 공부하고, ‘자유’에서는 말을 어떻게 실천해 더 나은 삶으로 도약할지 모색한다.     


말은 필연적으로 그 사람을 닮는다. 내면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은 감정을 거르지 않은 채 그대로 뱉어 내 관한 갈등을 일으킨다. 또 자기를 사랑하지 못하고 자존감이 낮은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신뢰가 불완전한 탓에 자신을 지나치게 숨기거나 반대로 과시한다.     

‘수양’의 목적은 착한 사람이 되는 데 있지 않다. ‘나’를 이해하는 데 있다 자신을 깊이 이해해야 사랑할 수 있고, 그 자리에 비로소 자존감이 자라 나의 마음 토대가 튼실해지기 때문이다.     


작품의 반의어는 아마 제품일 것이다. 제품이 획일적이고 수동적이라면, 작품은 독창적이고 능동적이다. 제품은 대체 가능한데, 작품은 불가하다. 그렇다고 작품이 제품보다 가치 우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에는 작품도 제품도 모두 필요하다. 사람의 삶만큼은 제품이 아닌 작품이어야 한다. ‘나’의 삶이 획일적이고 수동적이라면, 그래서 내가 없더라도 문제없이 나의 빈자리가 채워질 수 있다면 무척 서글플 것이다.

따라서 부모는 자식을 작품 같은 사람이 되길 바라야 하고, 학교와 사회 역시 각 개인을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작품으로 대우해야 한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나의 삶을 작품으로 창조하고 바라보는 일이다.

우리 사회는 개인들의 삶을 심지어 신체마저도 정상과 비정상으로 가른다. 사람을 제품으로 여기니 가능한 일이다.     


나를 관찰해 나에게서 일어나는 감정을 알아차리기만 한다면 그 감정은 다스릴 수 있다. 일찍 알아차릴수록 더 좋다. 석가모니는 먼저 몸의 현상을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한다. 어떤 감정이 일어나면 그 감정은 어떻게든 몸으로 드러난다. 분노가 일면 호흡이 가빠지거나 미세하게 몸이 떨린다. 이러한 현상에 주목하면 나의 감정이 싹트는 것을 더 발리 알아차릴 수 있다. 그러면 그 감정을 내 의지대로 더 키우거나 꺼뜨리기 쉬워진다.     

관점대로 즉 보는 대로 세상은 존재한다. 세상 자체는 객관적인데, 우리가 주관적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나의 주관에 따라 나의 세상이 달라지고, 나의 세상이 달라질 때 정말 객관적인 세상도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수양을 통해 언어생활의 기본인 나를 닦았다면 다음은 관점을 확립해야 한다.


자기 이해에 따라 사고하는 것은 당연하다. 앞에서 보면 앞태가 보이고 뒤에서 보면 뒤태가 보이는 것처럼, 내가 처한 자리가 곧 나의 관점이 된다. 기존의 관점을 바꾸고자 한다면 나의 위치를 전환해야 한다. 관점이란 필연적으로 위치의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지만, 앞자리에서 뒷모습을 상상하는 일도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내가 처한 자리를 옮기기 어렵다면, 역지사지하고 반성해 보는 것이다.      


말을 할 때 형식보다 중요한 것이 내용이다. 말의 내용을 깊게 하는 것이 지성이다. 지성이란 나를 알고 타인을 아는 것이며, 사람을 알고 세상을 아는 것이다. 그것도 적당히 아는 수준이 아니라 잘 아는 것이다. 타인의 말고 글을 타산지석 삼아 나를 돌아보고, 타인의 견문을 통해 나의 견문을 확장함으로써 지성을 연마할 수 있다. 지식은 나의 해석을 거쳐야 지성이 되고 지혜가 된다. 해설은 주어진 말을 알맞게 풀이하는 것이다. 해석은 말을 하는 화자와 그 말의 배경까지 꿰뚫어 보는 것이다. 해설은 객체로서 하는 것이고, 해석은 주체로서 하는 것이다. 세상의 지식을 익히고 이를 기반으로 나의 말에 힘을 부여하고자 한다면 해석하는 훈련은 필수다.     


죽음이란 우리 삶의 필연적 과제이며 그로 인해 역설적으로 삶에 깊이를 더한다. 죽음이 다가올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목표만 좇던 사람은 목표가 사라졌을 때야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게 된다. 그래서 죽음을 앞둔 새의 서글픈 단말마만큼이나 죽음을 앞둥 사람의 말은 큰 울림이있다. 끊임없이 바깥을 향해 질주하던 삶을 멈추었을 때 찾아오는 허탈함과 후회 혹은 평안과 깨달음은 본인은 물론 남겨지니 사람에게도 큰 의미를 던진다. 죽음을 진지하게 인식하려면 먼저 그런 것ㅇ르 고민한 선구자들의 말과 글을 보면 된다. 더 나아가 나와 가까운 이들의 죽음과 마주했을 때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 보는 것이다. 그러면 현재의 삶이 더 가치 있고 소중하게 느껴지리라.     


글을 읽었다면 분명 남은 바가 있어야 한다. 한 줄을 읽었다면 나의 삶도 그만큼 바뀌어야 한다. 글을 읽기 전과 후가 다르지 않다면 그것은 읽지 않은 것과 같다. 독서는 단지 지식을 쌓는 수단이 아니라 삶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관문이다. 그저 먹고사는 삶이란 의미 없다. 이 땅에 태어난 이상 무언가 의미 있는 것을ㄹ 남겨야 한다. 독서에서 그 길을 찾아야 한다.


독서 할 때 집중해야 할 대상은 글이 아닌 나 자신이다. 글을 읽을 때마다 나의 삶과 세상을 돌아보며 일어야 한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글을 선별해 읽어야 한다. 이것이 지성을 기르는 자세다. 책은 반드시 세 번을 읽아야 한다. 텍스트를 읽고, 다음 필자를 읽고, 최종적으로 독자 자신을 읽어야 한다.     

역사 공부의 목적은 과거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다. 현재를 보는 관점을 바꾸어 현실을 바꾸기 위해서다. 역사를 공부하면 지금 당연시하는 것들이 과거에는 그렇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그럴 때 현재 체제의 연속성 즉 견고함에 금이 가고, 현재를 바꿀 가능성이 열린다. 또한 과거를 살핌으로써 앞날을 예측하고 나아갈 방향을 잡을 수 있다. 이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근본적인 이유다.     


경청은 본격적인 말 공부에 진입하는 문이다. 상대의 마음을 여는 것은 말하기보다 ‘성숙한 경청’이다. 우리는 말 잘하는 사람이 아닌 잘 들어 주는 사람에게 마음을 연다. 경청해야 잘 말할 수 있다. 잘 들어야 상대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상대를 이해한 바탕 위에 비로소 나의 좋은 말을 세울 수 있다. 또한 듣기는 나를 지키는 최전선이다. 죄는 입으로 짓고, 상처는 귀로 얻는다. 말의 홍수 속에서 잘 들어야 나를 성장시키며 지킬 수 있다. 외부로부터 성장의 동력을 얻는 것도 나의 귀요. 타인의 날카로운 말을 무디게 하는 것도 나의 귀다.

내가 되고자 하는 모습은 말을 잘하는 사람이겠지만, 내가 만나고픈 사람은 나의 말을 잘 들어 주는 사람이다. 누구나 듣는 것보다는 말하려는 욕구가 더 강하기 때문이다. 빼앗으려거든 먼저 주어야 하는 게 이치다. 나의 귀를 주어야 상대의 말을 뺏고 마음도 얻는다. 내가 듣는 만큼 상대방은 말한다. 내가 듣기에 집중할 때 상대도 말하기에 집중하며, 내가 진심을 담아 들을 때 상대도 진심을 담아 말한다.     


관계란 어쩔 수 없이 이해와 오해의 종합이다. 관계에는 오해가 따를 수밖에 없다. 오해를 애써 외면하기보다 오해의 가능성을 과감하게 인정하는 편이 낫다. 그래야 진정 타인에게로 나아갈 수 있다. 오해를 인정하는 데에서 경청은 출발한다.      

들을 때 행간을 잘 파악해야 한다.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뜻이다. 누구나 감추고 싶은 선뜻 말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 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말이 곧 본뜻은 아니다. 말의 진의는 말의 행간을 파악해야 알 수 있다. 말의 행간을 본다는 것은 말너머의 맥락까지 아울러 본다는 뜻이며, 그래야 말의 도리, 즉 진의가 열린다.      


말 한마디가 주는 상처는 생각보다 깊다. 나를 향한 근거 없는 비난은 근거가 없어서 아프고, 이유 있는 비판은 이유가 있어서 또 아프다. 이런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좋겠지만, 타인과 관계를 맺는 이상 피하기는 불가능하다. 피하기보다 비난과 비판을 최대한 덜 아프게 받아들이고, 내게 이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게 더 낫다. 누가 나를 말로 공격할 때 그 말이 일리 있다면,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나를 위하는 척하지만 실은 기분 상하게 하려는 의도라는 게 훤히 보여도 그것에 휘말릴 필요는 없다 옳은 말이라면 받아들이고, 나쁜 의도는 무시하면 된다.     


우리 사회를 ‘질문 없는 사회’라고 한다. 질문이 없다기보다 한쪽으로 치우쳐 있다. 직장에서는 상사가, 학교에서는 교사가, 일상에서는 어른이 질문을 독점한다. 윗사람은 묻고 아랫사람은 대답하는 구조다. 

우리의 지향점은 질문다운 질문이 풍요로운사회다. 질문이 많으면 그 사회는 흐르는 물처럼 생동한다. 질문이란 곧 변화의 씨앗이고 소통을 현존시키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사람 사이를 기본적을 갈등 관계로 규정한다. 화합과 협동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나, 갈등하기 쉽다는 것이다. 나의 자유와 권리를 제약하는 것이 타인이기 때문이다. 타인이 없다면 내가 하고픈 대로 할 텐데 타인이 그걸 가로막는다.     


사람 간 갈등의 최전선이 바로 ‘시선’이다. 내가 타인을 바라볼 때, 나는 주체요. 타인은 객체다. 서로 마주 할 경우 동등한 대립 상황에 처한다. 그래서 권력을 쥔 자들은 시선을 차지하고 싶어한다. 누군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고 하자. 나는 그를 볼 수 없지만, 그는 나를 관찰한다. 그때 권력은 그에게 있다. 질문도 시선과 비슷하다. 바라보는 사람이 권력을 잡는 것처럼, 질문하는 사람이 권력을 갖는다. 질문을 받으면 그 사람은 어떻게든 응답해야 한다. 권력자들은 시선과 질문까지 독점하려고 한다. 그래서 약자들은 끊임없이 질문해야 하고 그를 통해 권력을 감시하고 세상을 바꿔 내야 한다.

‘질문을 하면 답이 나온다. 질문은 생각을 자극한다. 질문을 하면 정보를 얻는다. 질문을 하면 통제가 된다. 질문은 마음을 열게 한다. 질문은 귀를 기울이게 한다. 질문에 답하면 스스로 설득이 된다.’


※쇼펜하우어의 논쟁술     

말 잘하기에도 정공법이 있다. 생각한 후 말하기, 과하게 말하지 않기, 배려하면서 말하기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를 지키지 않는다. 원칙을 어기는 세상에서는 원칙만 잘 지켜도 기본 이상은 간다. 상대방이 원칙에 어긋나고 예상치 못한 말로 다가올 때 휩쓸리지 말고 원칙으로 대응하는 게 옳다. 괜한 말들로 자극하려 들 때도 마찬가지다. 담담하게 응수하는 것이다. 


일상에서는 부드러운 말씨가 최선이다. 말하려는 내용은 명확하게 하되 이를 담는 표현과 말투는 유연해야 한다. 말투가 너무 날카롭거나 건조하면 듣기 좋을 리 없다. 조언이나 충고를 할 때 그러면 더 최악이다. 당사자는 상대방을 위해 쓴소리를 했다고 자부하지만, 상대방은 끔찍하게 받아들였을 수 있다. 쓴소리는 상대방이 원할 때 해야 한다. 상대방이 먼저 요청하지 않는 충고는 하지 말아야 한다.     


대화에서 생기는 문제는 무지에서 비롯된다. 타인에 대한 무지, 관계에 대한 무지, 감정에 대한 무지, 때와 상황에 대한 무지, 말에 대한 무지, 대화 주제에 대한 무지, 모르면서 잘 알고 있다는 착각까지 얹히면 더 심각해진다. 자신의 무지를 깨달으려면 논리적으로 말하는 연습이 중요하다. 진정 필요한 것은 온전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겸손함과 온전한 앎에 다가가려고 꾸준히 노력하는 자세다.     


말을 할 때는 세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먼저 고찰을 해야 한다. 깊이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 여과 없이 뱉은 말은 나를 해치고 타인도 해친다. 말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고찰은 사실에 근거해야 의미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실천해야 한다.      


사람은 자기 잘못에는 관대하지만, 타인의 잘못에는 매우 엄격하다. 열 말 중 일곱 말을 지켰을 때 나는 스스로 신뢰 있는 사람이라 여기지만, 상대는 내가 지키지 않은 세 말에 주목한다. 그러고는 나를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판단한다. 말이 무서운 이유다.     


책 소개     

말의 내공. 신도현, 윤나루 공저. 2018.11.12. ㈜행성비. 210쪽. 14,500원. 


신도현. 인문학자. 대학에서 철학과 국문학을 전공했다. 세상을 바꾸는 공부와 자신을 바꾸는 공부가 함께 가야 하며, 그래야 진정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윤나루. 고등학교에서 국어와 글쓰기를 가르치고 있다. 수필로 등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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