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일기
얼마 전부터 복싱장에 9시 멤버들이 오지 않는다.
더 자세히 말하면 어른들이 오지 않는다.
눈 꼴 시리던 커플들도, 맹연습하던 아저씨도, 복싱장에서 모르는 학생이 없던 중년 여성분도, 혼자 라이벌로 삼았던 긴 검정머리 분, 새로 등록했던 짧은 머리 분, 갈색 머리를 항상 묶고 지쳐 보이셨던 분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나만 빼고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건가?
아니면 어른들만의 일정이 있는 건가?
대신 항상 비슷한 시간에 오는 학생들이 있다.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학생이 있다. 같이 다니는 친구들 중에 진도가 가장 느린 남학생이다.큰 덩치에 까치집 같은 머리, 검정 뿔테 안경을 쓴 인상 좋은 곰돌이 푸 같다.
이 남학생은 연습을 잘 안 한다. 아니, 쉬는 시간이 길다.
쉬는 시간에 주로 친구들이 연습하는 걸 구경하거나 괜스레 관장님께 말을 건다.
이거 이렇게 하는 거 맞아요?
저는 이 동작 언제 해요?
관장님이 야단을 친다.
너 인마, 얘도 다 너 하는 것부터 시작했어.
처음에 쨉쨉부터 배웠어.
다 차근차근 한 거야.
너도 이거 다 하면 배울 거야.
남학생은 풀이 죽는다.
관장님은 곧 응원의 말을 건넨다.
얘 부러워할 거 없어.
너는 너만의 장점이 있는 거야.
얘는 체구도 작고 말라서 너 같은 체격을 얼마나 부러워하는지 알아? 그렇지?
얘는 빠르고 민첩한 장점이 있고, 너는 파워가 센 거지.
너도 열심히 연습하면 돼.
나는 속으로 맞장구를 쳤다.
...
한창 연습 중인데 뒤에서 또 관장님의 훈계가 들렸다.
너 인마 거기서 그거 할 때가 아니야.
다른 사람이 하는 게 멋있어 보인다고 나도 쳐볼까? 따라 하지 마
너는 너 진도를 다 끝나는 게 우선이지 하는 거지.
니 거 다 하고 남은 시간에 다른 운동 하는 거야.
지금은 그거 할 때가 아니야.
다시 가서 샌드백 쳐.
남학생은 오늘따라 유독 기운이 없어 보인다.
어느 순간엔 관장님 말을 이해하겠지.
사실 나도 뜨끔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진로 고민이 많다. 다른 사람들이 하는 건 모두 멋져 보인다. 대학원을 갈까? 큰 회사에 취업을 할까? 유학을 갈까? 사업을 할까?
이 고민을 듣던 한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경채 씨의 10년 뒤를 생각해 보세요. 지금부터 뭘 하든 10년 하면 거기서 뭐라도 길이 생길 거예요. 아니면 딱 5년 동안 어떤 공부를 하면 좋을지라도 생각해 보세요.
사실 내가 어떤 모습이 되고 싶은지, 이것부터 모르겠다.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내 욕망을 모르고, 내 미래를 모르고,나의 지금도 모른다. 내가 지금 어떤 길에 서 있는지,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지, 그 길의 어디까지 왔는지 모르겠다.
상담 선생님은 스스로를 알아보는 시간이 필요한 것 같다고 하셨다. 그동안 나는 엄마의 욕망을 욕망하거나, 주위 사람의 인정에 따라 움직였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니 스스로도 확신이 없었다. 다음 시간까지 나를 기록해 보기로 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하고 싶은 것들. 그 생각을 하니 두근거렸다. 앞지르고 싶던 주변 사람들의 길과 내 길이 달라 보였다.
나도 내 진도에 집중해야겠다.다음에 또 그 남학생을 만나면 마음속으로 무한한 응원을 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