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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경채 Aug 27. 2023

인생은 대회가 아니니까, 좀 쉴게요

복싱일기


부상을 당했다. 샌드백을 치면서 오른손목을 삐끗했다. 관장님은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힘보다 강하게 쳤거나, 정확한 곳을 치지 못해서 손목이 꺾인 것 같다고 했다. 맞다. 샌드백을 치자마자 알았다. 아, 잘못 쳤다. 아프다. 이틀 뒤에 파스를 붙였다. 영광의 흔적 같았다. 언뜻 보니 문신을 가리는 패치 같았다. 여러모로 강해진 듯하다.


운동 관련 유튜브에 매번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댓글이 있다. ‘000으로 치료 중입니다. 의사 선생님이 되도록 운동하지 말라는데 000 정도는 해도 되나요?’ ‘아니요, 하지 마세요.’ 의사가 운동을 쉬라는데 트레이너에게 이 정도는 되냐고 묻는 저 집착. 남일 같지 않아 졌다. 손목을 다치고도 3일을 복싱에 나갔다. 다들 나에게 운동을 쉬라고 한다. 나는 쉬지 못하겠다. 계속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 운동을 쉬면 애써 만들어 놓은 근육이 사라질 것 같다. 한창 부스터로 달리고 있는데, 갑자기 시동 꺼진 차로 갈아타야 하는 상황 같다. 뜨거운 물보다 예열시간을 힘들어한다. 마땅히 쉬어야 할 이유가 있지만 때로는 농땡이 피우는 사람 같다. 대회를 준비하는 선수도 아닌데 그런 기분이 든다.


살다 보면 회복되지 않는 일이 많다.

1년 반 전에 발가락에 실금이 갔었다. 눈이 정말 많이 내리고 한파가 매섭던 겨울이었다. 이쯤 되면 다들 길에서 미끄러졌겠다 싶지만, 집에서 다쳤다. 침대에서 내려오다가 바닥에 있던 요가매트를 잘못 밟았다. 엄지가 구부러지면서 미끄러졌다. 아니, 미끄러지면서 엄지가 구부러진 건지도 모른다. 정확히 기억하는 게 하나 있다. 너무 아파서 아무 소리도 못 낸다는 게 이런 거구나, 발가락을 부여잡으며 깨달은 순간이다.


일주일이면 낫는다고 해서 콩콩이로 걸어 다녔다. 나중엔 목발을 짚었다. 그다음엔 반깁스를 했다. 그렇게 2달을 누워있었다. 이게 다 내가 무리해서 움직인 탓이다. 상태가 조금만 괜찮아지면 다 나은 줄 알았다. 2달 후, 의사 선생님은 뼈가 살짝 어긋나게 붙었지만 이 정도는 사는데 문제가 없다고 했다. 다친 지 1년 반이 지났다. 아직도 회복이 되지 않았다. 피곤한 날이면 엄지발가락이 시큰거린다. 다시 찾아간 병원에서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나는 안다. 이상하다는 걸.


회복은 다시 원래 상태로 돌이키거나 원래의 상태를 되찾는다는 뜻이다. 살다 보면 회복되지 않는 일이 많다. 내 발가락도 그렇지만 내 마음도 그럴 때가 많다. 조금씩 어긋난 채로 살고 있다. 회복하는 시간을 잘 보내야 여기저기 삐뚤어지지 않을 텐데 말이다.


우리는 회복하는 시간에 익숙하지 않은 걸까?

왜 모두가 대회를 준비하듯 사는 걸까?

학창 시절에는 필사적으로 쉬는 시간과 방학을 사수했는데 어느 순간 어색해졌다. 쉬는 중이 아니라 게으르게 사는 중이고, 방학이 아니라 뒤쳐지는 시기라고 여겼다. 물론 정말 게으르고 뒤쳐지는 중일지도 모른다. 26살, 졸업유예생에 자칭 프리랜서인 나는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다. 나에게 맞는 쉬는 시간을 모를 때도 있고, 잘 쉬어야 한다는 강박을 갖거나, 쉬고 난 다음에 뒤처질 것 같아서 뭐라도 해 놓는다. 주변 동료들은 하나둘씩 쌓아온 커리어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 같고, 옛날 친구들은 취업에 성공해 꼬박꼬박 월급을 받는다. 나는 조급해졌다.


이 정도 아픔은 괜찮지 않을까?

돌아보니 복싱을 다니면서 종종 다쳤다. 한동안 새끼손가락을 못 구부릴 정도로 퉁퉁 부어있다거나, 아령을 들다가 목에 담이 걸린다거나, 큰 부상은 아니라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이 정도 아픔은 괜찮지 않을까? 통증을 느끼는 건 나인데, 기준을 다른 곳에서 구했다. 복싱뿐만이 아니다. 누구는 -하는 중인데 나 같은 게 쉬면 안 되지, 상담을 갔다. 제가 이 정도로 상담을 받아도 될까요? 선생님은 내가 힘들면 힘든 거라고 했다. 손목을 다친 지 10일이 넘어간다. 병원을 가봐야 할 것 같다.








* '권투를 빌어요'는 '건투(健鬪)를 빈다'를 권투적 허용으로 사용한 말입니다. '의지를 굽히지 않고 씩씩하게 잘 싸운다'는 뜻은 건투(健鬪)가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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