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학교에 가면 우선 교과서가 다르고 먼저 선생님이 수업하던 진도를 이어가야 하므로 새로운 수업 PPT와 학습지를 만듭니다. 이번에도 전날까지 다른 학교에서 다른 교재로 수업을 하여서 퇴근하고 새로운 자료를 만들었습니다.
주말에는 큰딸이가 발령지 근처로 이사하고 필요한 살림살이를 사느라 미리 준비할 시간이 없어서 새 학교 출근 전날 급하게 수업 준비를 하다 늦게 잠이 들었습니다.
한밤중에 세차게 내리는 빗줄기 때문에 잠이 깨어 이생각 저생각으로 마음이 뒤숭숭하여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예전에도 20km 정도야 자가용으로 운전해서 다녔지만 최근 6개월 간 너무 편하게 다니다 보니 25km 운전길이 조금 두렵고 또 새로운 학생과 교사를 만나는 일이 조금 걱정스러웠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을 한꺼번에 만나게 되는 일이니까요.
게다가 어젯밤 저와 같이 새로운 학교에 출근하기 위해 방을 얻어 나간 딸이 잠은 잘 자는지, 불편한 것은 없는지 하는 생각까지 하니 가을비 소리가 걱정에 풀무질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처음 출근할 학교를 방문하러 갔을 때 느껴지던 신도시의 산뜻하고 따뜻한 느낌이 약간의 설렘으로 작은 기대를 일으키기도 하며 마음은 한없이 산란했습니다. 마치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여기저기 맴도는 잠자리의 투명한 날개처럼 지난밤의 밤잠은 저를 스치기만 했습니다.
겨우 눈을 감고 한두 시간 있다가 일어나 어젯밤 내려놓은 커피와 사무용품, 파일 등을 챙겨 들고 아침 7시가 조금 넘어 차에 올랐습니다. 이른 시간이라 출근길이 심하게 막히지는 않았어도 45분 걸렸습니다.
잘 다니지 않던 길이라 눈에 들어오는 풍경을 보며 길을 익히는 것이 나름 흥미로웠습니다.
길이 익숙해지면 장거리를 다니는 동안은 성경 듣기나 음악을 듣는 일이 즐거울 것입니다. 오랜만에 낯선 길을 달리며 일상이 여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주마간산으로 풍경만 보는 게 아니라 새로운 지역에서 근무하며 사람을 만나고 지역의 문화도 만나니까 여러 학교를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생생한 견문이 있는 여행이 되기도 합니다. 분명 대한민국의 교육법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지만 그 상황과 운영이 학교마다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 보니 이번 출근지는 어떨까 하는 궁금증 안에 기대, 걱정, 호기심이 고루 섞여 있었습니다.
시원하게 달리다가 속도 제한도 있다가 어디쯤에서는 막히기도 하며 드디어 학교에 도착했습니다.
정규직 교사들도 학교를 몇년마다 옮겨다니기 때문에 교사들은 거의 승용차로 출근을 합니다. 언제나 학교는 주차장은 협소하고 지난번에는 좁은 곳에서 차를 빼다 난간에 부딪히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앞뒤 간격도 널찍해서 회전하기 좋습니다.
학교 환경은 대부분 시대변화보다 열악했고, 아파트 단지 밀집지역의 학교 부지는 학생수에 비해 형편없이 작았지요.
백년지대계인 교육의 현장이 건설 회사의 원치 않는 필수옵션이었느니 넉넉한 부지를 주었을 리 없었겠지요.
신도시는 학교 부지를 국가에서 설정해 놓아 그런가요. 사고의 전환일까요?
이번에는 학교부지부터 확보했나 봅니다.
주차장도 시원스럽고 건물 안 로비 공간도 넓어 학생들이 자유롭게 스터디를 하거나 토론을 할 공간이 충분합니다.
수업 시간에 이해가 부족한 학생에 대해 보충 설명을 하거나 교사와 학생 간의 토론을 하기에도 좋은 공간입니다.
앞면 유리 창 앞에는 키다리 의자가 나란히 있어 카페처럼 창밖을 바라보기 좋습니다. 맞은 편 유리창 앞에는 게시판용 철망이 있어 자유롭게 학생들 작품이나 게시물을 걸기에 좋고 양쪽 모두 파란 하늘을 보기에 좋으니 실내에 있어도 가슴이 탁 트이는 느낌입니다.
물론 코로나19 4단계인 지금은 고요히 그 장소들이 학생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학교에서 들어서니 어젯밤 걱정이 사라지고 시원한 가을이 바람이 몸과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교무실에 앉아 자리를 정리하는데 부장님이 출근하시며 출근길 어땠느냐고 힘들지 않았느냐 물어보며 반갑게 인사합니다.
나중에 보니 휴대폰으로 출근 응원 메시지까지 보내셨더라고요. 아침 먹었느냐고 물으며 구운 계란을 주시며 냅킨과 종이컵까지 챙겨주시네요.
기간제 교사 장거리 출근이라 교장, 교감님까지 제가 있는 3층 교무실로 오셔서 출근길 괜찮았냐고 묻고, 부장님께 출근하는 학교가 달라져서 불편한 것 하나도 없게 신경써주라고 당부까지 하시니 뭐, 제가 승진해서 학교를 옮긴 것 같은 기분이 드네요.
가르치는 학생들이 오늘만 등교하고 또 온라인 수업이라 급히 학습지 인쇄를 부탁하니 등사실 기사님이 교무실까지 배달을 해주시네요. 보통은 하루 이틀 전에 맡기고 등사실에 본인이 가서 인쇄물을 찾습니다.
저는 오늘 출근하여 미리 맡길 시간이 없었고 새롭게 만난 아이들에게 한자 쓰기 보다는 1학기 말 복습 활동으로 한자 퍼즐을 하고 싶어 동동거렸더니 주무관님께서 제 상황을 알고 바로 등사해서 교무실까지 갖다 주신 것입니다.
수업에 들어가니 새로 온 선생님을 저만큼이나 설레고 기다린 학생들의 반응이 보입니다. 머리 긴 젊은 선생님을 기다린 학생들도 있고, 벌써 시험 걱정을 하며 칠판에 환영합니다, 그런데 시험은 어렵게 내주지 마세요 하는 메세지가 써 있기도 했습니다. 복도에서 마주치면 밝은 모습으로 인사하는 것을 보니 해맑고 착한 청소년들이 여기도 가득합니다. 어린 아이와 청소년, 청년들의 행복한 얼굴이 바로 국가의 힘이겠지요. 6교시에는 아무래도 학생들이 약간 지치기도 하니 제 이름을 소개하는 것 대신 처음으로 선생님 이름 맞추기 초성퀴즈를 해보았네요. 제가 박씨나 정씨로 보인다네요, 제일 많은 김씨나 이씨로는 보이지 않았나봐요.
이 학교는 개교한 지 3년되었는데 교장 선생님부터 모두가 배려하고 화목한 학교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으쌰 으쌰 애쓰는 것이 느껴집니다.
새 노트북을 받아 약간 서먹해하니 옆자리 선생님께서 뭐 도와드릴까요 하십니다.
물론 이전 학교도 친절한 선생님이 많았지만 여긴 뭔가 전체가 하나 되어 말만 신도시의 새 학교가 아니라 의식적인 변화를 위한 노력이 느껴집니다.
그 안에서 저도 보다 새로워지고 구태의연한 관념이나 타성에 젖은 마음이 있다면 싹 씻고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점심시간 풍경이 좀 낯설었네요.
이전 학교는 급식실에 불투명 칸막이가 있거나 한쪽으로만 앉아 등을 보고 먹었는데, 여기는 식판을 놓으면 한 10cm쯤 여유가 되는 공간 위에 투명 칸막이를 두고 마주 보며 밥을 먹자니 아직 모두가 낯선 분들이라 앞자리 사람이 너무 가까워서 민망하더라고요.
그것도 처음 보는 남자 선생님이 앞에 계셔서, 고개를 푹 숙이고 조금씩 꼭꼭 씹어 먹었네요. 그분도 거의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식사하시더라구요.
모두가 새롭고 희망찬 느낌이 드는 가운데 몇 년 전 세상 떠나신 선배님의 자취를 이곳에서 만났습니다.
제가 졸업한 학교에서 한문교육 교과 교육론을 가르치시던 교수님이자 학교 선배님이던 분의 저작이 학교 교과서로 채택되었더라고요.
몇 년 전 60대 초반의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떠나신 선배님. 그분이 떠난 계절도 가을이었습니다. 연세와 경륜이 있어도 후배들에게 항상 깍듯이 존중해주시고 배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그러면서 온라인 강의와 여러 한문 학습방법을 연구를 열정적으로 하던 분이었습니다.
장례식장에서 뵈었던 사모님에게서도 소탈하고 순수함이 느껴졌습니다. 그런 자리에서 많은 말을 할 수도 없고 다만 안타까운 마음만 전하였지요.
선배님은 제가 출판사에 근무할 때, 그곳에 일이 있어 오셨다가 사내 서점에서 책을 하나 사 주셨습니다. 저에게 책을 하나 고르라고 하셔서 어느 여류작가의 여행기를 골랐습니다.
학교도 조직이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들이 조직의 운영에 반영되고 다양한 분위기의 학교가 존재합니다. 물론 학생들은 더 다양하지요.
제가 여기 온 것은 우연이지만 또 우연이 아닌 필연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생이 저의 의지로 흘러가기도 하지만, 그 많은 학교 중에 이곳에 와서 새로운 학생과 교직원들을 만나는 것 또한 신이 주신 사명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어느 곳에서는 항암투병을 끝내고 복직한 선생님과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기도하기도 했었습니다.
작년에 갔던 학교에서는 위태하게 보이며 방황하던 아이가 아파서 집에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초등학교 시절 있었던 속상한 일을 제게 이야기한 후로, 학교 생활을 열심히 하기도 하였습니다.
선택의 범위가 넓지 않은 저의 새 직장이 정해지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우연이지만 필연적인 만남의 출발 선상에서 제가 주어진 역할을 다하고 행복한 만남이 이어지길 바랍니다.
또한 몇년 전 가을 세상을 떠나신 선배님이자 은사님의 저작 교과서를 학생들에게 가르치며 교과서에 담긴 선인들의 말씀뿐만 아니라 그 글들을 책에 올린 선배님의 뜻까지도 학생들에게 전달하고 싶어집니다.
여름은 여름의 역할을 다하고 떠나며 결실은 가을에게 맡깁니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 만나는 사람과 이별하는 사람들 각각 자기의 역할을 다하는 가을이면 될 것 같습니다.
학교 벽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에서 한알 한알 영근 씨앗이 자기만의 찬란한 보라색 빛을 발하네요. 꽃잎도 이곳에서 필연적인 만남을 하는 모두의 꿈과 행복처럼 노란빛으로 밝게 피어 있습니다.
이 가을 우리의 삶도 이제는 열매를 만들어 갈 수 있기를, 하루하루 영글어 가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