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소설] 4. 11월 15일 금요일 심근경색(3)
4. 11월 15일 금요일 심근경색(3)
어느 순간 나는 모든 에너지가 소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가슴 통증도 한동안 나타나지 않았다. 마음속에 암덩어리가 기생하는 것 같았다. 가끔씩 그 암덩어리는 마음속에 검은 그림자를 쑤욱 집어넣었다. 검은 그림자들은 온몸과 머릿속에 스며들어 그나마 온전한 것들까지 사정없이 갉아먹고 힘을 키웠다.
나는 그걸 알면서도 방치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결국 빈껍데기만 남겨진 느낌이 나를 휘감았고 번데기처럼 숨겨진 나는 시간만 나면 잠을 잤다. 잠은 잠을 불러왔고 자도자도 잠은 모자랐다. 차라리 동면 상태였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내게 허용되지도 할 수도 없었다. 일을 해야 했으니까.
길고 긴 우울증이 지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연락을 끊고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하는 일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빚이 없었더라면 살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기에 대한 기억들이 소멸하여 어떻게 살아냈는지 모르겠다.
그러다 스토커가 나에게 집착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나는 또 흉통이 시작되었다. 집을 나설 수도 들어갈 수도 없을 만큼 스토커는 집요하게 지켜보며 만나주기를 요청했다.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경찰에서는 주변 순찰 외에 해줄 수 있는 게 없다고 했다. 내가 만나주지 않자 스토커는 어떻게 알아냈는지 내가 사는 아파트 현관문에 종이 지폐를 넣고 불을 질렀다. 경찰이 출동하고 일은 마무리됐지만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는 나는 일상생활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주변을 살피며 모든 것들을 피해 다녔다. 어느 날 스토커는 지하 주차장에 있는 내 차의 백미러를 모두 망가뜨려서 운전을 못하게 만들었다. 몸에 마비 증상이 온 나는 남편에게 전화했다. 눈물만 나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남편은 그 길로 바로 달려왔다. 스토커는 몸속에 칼을 품고 있었으나 남편이 어떻게 했는지 칼부림은 일어나지 않았다.
혼자 내버려두어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판단한 남편은 내가 사는 아파트로 왔고 우리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야반도주하다시피 이사를 했다. 그렇게 다시 결혼생활이 이루어졌다. 남편은 정신을 차리고 일을 하면서 무기력한 상태로 일을 다니는 나를 위해 정성을 다해 외조했다.
마음의 안정과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다. 남편은 동업자에게 사기를 당하고 명의를 도용당했다. 검찰 조사를 받으며 일이 해결되는 듯했으나 문제는 엄청난 세금이었다. 남편은 뜬금없이 빌딩 건물주가 되어 어떻게 할 수 없는 종부세 폭탄을 맞았다. 급여든 뭐든 모든 것들이 압류당할 처지에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남편은 나를 보호하는 형식적인 이혼이라 했으나 이것이 끝내 쉽게 헤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흉통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주도 내려온 후 남편에게 노후대책을 세워보자 했다. 내가 들은 답은 ‘아무 생각이 없다. 아무런 비전도 대책도 없다.’였다. 다시 살아보려 노력하던 나는 그 말이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래서 다시 ‘각자 갈 길을 찾아보자’한 게 마지막 이혼인 셈이다.
언젠가 그가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좋겠다!’라는 말을 했었다. ‘다시 처음부터 제대로 잘해보고 싶다!’ 이 말을 들었을 때 울컥했었다. 인도 할머니가 다시 나타나 과거로 보내준다면 나는 어떻게 할까?
스트레스 때문일까? 술과 흑돼지 때문일까? 스트레스와 술? 어느 조합이어도 가능하다. 중요한 건 나는 이제 정신만큼은 과거처럼 암울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심근경색에 걸릴 일은 없다. 일단 술을 끊어보자.
술을 끊겠다 하니 곰팅은 믿지 못하겠다며 놀렸다. 나는 편하게 생각하기로 했다. 만약 술 생각이 나면 맥주 마시면 되지, 이참에 맥주나 배워볼까 싶었다. 지난 10월 술자리 이후 나는 육류보다 과일과 야채를 주로 먹었다. 단지 운동하기 싫은 게 걸릴 뿐.
술을 끊었다고 생각해서 그런지 신기하게도 술 생각은 더 이상 나지 않았다. 맥주는커녕 본의 아니게 뭔가 웰빙식단으로 바뀐 것 같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몸이 건강해지는 느낌에 활력이 되살아난 것 같았다.
그래도 보라색 글씨가 눈에 거슬리고 찜찜하니 맘 편하게 병원에 가서 진료나 받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보라색 15일에 조퇴하고 병원에 갔다. 나의 흉통 지속시간은 5분 내외임을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강조했고, 의사는 ‘역류성 식도염’이다. 또 그러면 다음에 내시경 검사를 하자고 했다. 약을 먹는 게 이렇게 쉬울 줄이야! 병원에 가기 전, 진료 전후 솔직히 무서웠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 잠이 들어 그런가보다. 술을 끊었으니 괜찮을 거다. 11월 15일 보라색 글씨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것도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이건 분명히 선물이 맞았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꽃을 피우려고 매일매일 마음 다잡고 밝게 살아가는 나를 위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희망이 보였다.
과거는 고정되어 있을지라도 미래는 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