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카제 Jul 15. 2022

[나의 해방일지 리뷰 3]
言(말)로부터의 해방

넘치는 말과 사라진 말, 그리고 쉬는 말들...


言(말)로부터의 해방

; 넘치는 말과 사라진 말, 그리고 쉬는 말들...


이 드라마에서 말은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은 내용뿐 아니라 형식도 포함한다. 배우들의 발화량이 인물의 특성을 규정하고, 그 발화량의 변화가 인물의 변화를 나타낼 정도이다. 여타의 드라마에서 말은 대사이며, 의미를 전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하지만 나의 해방일지에서는 그 이상이다.

무수히 많은 말을 했어도 아무말도 하지 않은 것 같은 허무함, 정성스러운 겉말들이 지니는 무용함, 본질에 다가가는 말들이 지닌 힘, 그리고 침묵의 예리함과 무언의 유용함에 대해 이 드라마는 말하고 있다.

우리들은 드라마 내내 시끄러울 정도로 쉬지 않고 말을 꺼내놓는 사람, 말에 지친 사람, 말이 고픈 사람, 말하지 않는 사람, 말로부터 도망간 사람을 만난다. 작가는 이들을 통해 우리에게 진짜 소통과 진짜 말이라는 게 무엇인지를 묻고 있는게 아닐까?



기정과 창희 ; 말이 고픈 사람


 "나 하고 싶은 말은 못했어. 존재하는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화인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기정과 창희의 말은 넘친다. 그 넘치는 말의 대부분은 동료에 대한 욕이거나, 자신의 신세 한탄이거나 어떤 일에 대해 즉자적 반응으로 신기할 정도로 순식간에 쏟아져 나오는 말들이다. 그들은 떠들고, 떠들고, 또 떠든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들은 고프다.

여느때처럼 친구에게 한참을 떠들어댄 기정이가 말한다.

" 나 아무한테나 전화 와서 아무말이나 하고 싶어." 황당해하는 친구에게 "나 하고 싶은 말은 못했어. 존재하는척 떠들어대는 말 말고, 쉬는 말이 하고 싶어. 대화인데, 말인데, 쉬는 것 같은 말..."

쉬는 말이라는 단어를 듣고 생각했다.우리에게 말이 쉼인 적이 있었는지.

모르는 사람의 말, 아는 사람의 말, 듣기싫은 말, 하지 못하는 말,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 등 때론 청자로서, 때론 화자로서 우린 말로 상처를 주고받는다.

어떤 이와의 말은 침묵보다 불편하고, 어떤 사람과의 침묵은 대화보다 편안하다. 꾸밈없이 본질을 마주하고 나누는 진솔한 대화, 가짜는 모두 버려도 되는 진짜 대화, 수용된다는 확신 아래 주고받는 침묵은 '쉬는 말'이 될 수 있을까?



구씨와 염제호 ; 침묵의 대화


반대로 한 회에 목소리 한 번 듣기가 힘든 인물들이 있다. 바로 구씨와 미정이 아빠(염제호)이다. 염제호의 인물설명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말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되어 있다. 모두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때론 존재하는 척 떠들어댈 때 염제호는 침묵으로 말한다. 그의 쉼없는 노동은 침묵과 함께 묵묵히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법일지 모른다.


소통하기 어려운 그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이는 다름아닌 구씨. 둘의 소통은 침묵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말하기 전에 채운다. 말을 나누진 않지만 마음은 나눈다. 작업을 할 때도, 염제호가 구두쇠 영감에게 돈을 떼일 때도, 구씨가 도움이 필요할 때도 모든 순간 서로 살피며 말없이 이미 채우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침묵은 자연스럽다. 침묵 앞에 어떤 쓸데없는 말을 꺼내려 고민하지 않는다. 우리의 언어적 약속이 깨어지는 무언의 순간, 그것을 어색해하고 불편해하는 이는 시청자뿐이다. 어른의 말에 대꾸하지 않는다고, 누군가에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작업을 끝낸 낮에 낡은 호프집을 찾아 마주앉은 염제호와 구씨 사이에는 어색하지 않은 침묵만이 흐른다. 둘 사이 말의 공백을 tv에서 흘러나오는 스포츠 중계소리가 채운다. 침묵도 서로의 용인 하에는 어떤 말보다 편안할 수 있구나 느꼈다.

말의 여백마저 채워야하는 강박을 가진 나는 스스로를 돌아봤다.



구씨와 미정 ; 쉬는말


염기정이 말한 쉬는 말이 이들의 대화가 아닐까. 둘 다 말이 힘든 사람들이다. 미정이가 직장에서 하는 대화는 말보다 미소로 대체되는 경우가 많다. 괜찮은 시간은 1시간도 안되고, 견디는 시간이 대부분이란 말 속에 직장에서 미정이가 짓는 단정한 미소가 떠오른다.


회사 동료가 미정이에게 했던 말들은 언뜻 보기에 모두 듣기 좋은 말들이다. "미정이, 귀여워!", "미정이 예쁘지 않아요?" 하지만 이 말들의 속뜻과 의도는 정반대에 가있다. 아마 그녀와 불륜인 팀장이 했던 말들과 오히려 맞닿아있을 것이다. 이런 거짓의 말들 속에서 미정은 포기하듯 견디며 살았다. 구씨도 마찬가지다. 업장의 요란한 음악소리, 떠드는 소리, 자신을 질리게 하는 수많은 말들, 그 속에서 목숨까지 지켜야 하는 예민함으로 잠들지 못하는 들개처럼 살았을 것이다.


이런 그들이 만나 서로 진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서로에게 쉼이 되는 대화. 서로가 서로이기에 나눌 수 있는 대화. 솔직해도, 내 속을 다 들여다보여도 괜찮은 대화 말이다. 부부라도, 부모 자식간에도 그런 대화는 어렵다. 그리고 우리에겐 그렇게 수용되었던 경험도 많지 않다.


이쯤에서는 나도 정말 쉬는 말이 하고 싶다. 쉬는 것 같은 말을 듣고싶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누군가가 우리에게 쉬는 말을 했으면 좋겠다. 솔직함이 상처가 되지 않고, 어떤 거짓말로 꾸밀 필요 없으며, 진짜 고민과 진짜 생각을 안전하게 터놓을 수 있는 그런 휴식이 되는 말...나의 생각이 그 사람의 생각과 만나 부딪히고 상처받기보다 넉넉해지고 깊어지며 심지어 쉬어가는 그런 말...

난 쉬는 말이 듣고싶다. 정말 쉬는 말이 하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주택살이 5] 벌레와 함께 살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