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은 영원히 반복한다
어떤 삶의 양태는 끊임없이 자신을 변용하며 영원히 회귀한다. 그 상황이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외친다. “또 이런 일이?”,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왜 나야?”, “이게 삶인가?”, “삶을 포기하고 싶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하 "차라투스트라")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조언한다. “웃어라!”, “그것이 삶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다시 한번!” : 아모르파티. 이렇게 보면 삶은 참 쉽다. 그러나 니체가 본인의 삶으로 보여주었듯, 어떤 삶의 국면은 자신의 심연을 반영하는, 끔찍한 고통과 함께 다시 삶에 나타난다. 그 형언할 수 없는 절망감…
"차라투스트라"에서 차라투스트라는 자신이 가진 인류에 대한 ‘동정심’과 싸우며, 성서의 욥이 떠오를 만큼 극단적으로 절망한다. 그는 ‘절망-회복’을 반복하며 자신을 뛰어넘고, 위버멘쉬(자신의 운명을 극복하는 사람)의 철학을 정립한다. 니체의 유명한 경구 :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우리를 강하게 만든다. 그러나, 우리를 죽일 수 있는 고통이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기지 못하는 고통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은, ‘욕망(=힘에의 의지)과 영원회귀’로도 볼 수 있다. 그는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을 언급하며, 영원회귀의 특징은 ‘선별’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반복은 ‘일반적이고 동일한 것’을 낳지 않고, 어떤 ‘선별된 차이’를 변용하며 운동한다. 선별적으로 영원히 개봉되는 욕망은 무엇일까? 기독교에서 ‘나의 십자가’라고 표현되는 대상, 불교에서 ‘카르마’라고 표현되는 대상과 유사하지 않을까? 그것이 자신을 드러내는 한편, 세계는 그에 부합하지 않았을 때 인간은 키에르케고어가 ‘죽음에 이르는 병’라 말한, 절망을 경험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어떤 사태끼리 만날 때, 서로는 서로에 의해 주름이 잡힌다. 한쪽은 볼록 튀어나오고, 한쪽은 오목해진다. 그는 베르그송의 ‘기억-역원뿔 도식’을 자주 활용하는데, 이 도식에 대한 그의 해석에 따르면, 강렬함-차이의 장 위에는 미분소-차이(순수 무의식)의 장이 있다. 그는 미분소-차이가 운동하는 예로, 애벌레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음에도 변태(變態)하는 모습을 든다. 이 미분소-차이의 장(場)은 욕망의 고른판이다. 이 판에서 운동하는 욕망은 현실(S)에서 자아가 모르는 사이에 자신을 개봉한다.
그 결과, 우리는 고유한 주름-잡힘을 기초로 어떤 사태와 대면하고, 반복 끝에는 ‘내 삶’이라 불릴 만한 무엇인가가 존재하게 된다. 환원될 수 없는 차이를 내포한, ‘내 삶’. 그 삶 속에는 강렬한 ‘어떤 것’이 자꾸 돌아오고, 반복을 통해 그 사실을 인지한다. 하지만, 이 반복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나는 이 반복 앞에서 무력하다. 그 반복 앞에서 발버둥을 쳐보지만, ‘어떤 것’에 더욱 주름 잡힐 뿐이다. 그저 나는 자유로이 세계에 버려졌고, ‘선택’만 할 뿐이다. 본래적 실존을 포착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어떤 것’은 자신을 끊임없이 자신을 변용하며 돌아온다. 나 또한 나를 변용하며 그것과 싸워나간다.
사랑이자 빛이신 주님은 깨진 그릇의 틈(=상처)을 통해 자신을 현현(顯現)한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다. 모순, 부조리, 즉 삶을 명철히 직면하고 끌어안으며, 내가 가진 빛을 개봉하는 삶… 모든 상황에서, 고난에 의해 꺾이든 고난 앞에 굽히든,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든, ‘절망하지 않고 살아내는 것’, 그것이 덕(德)이요 선(善)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