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융회통
자타불이(自他不二), 일심(一心), 제물(齊物) - 도(道)로써 만물을 원융회통하는 단어들이다. 도(道), 이치[理]의 관점에서, 만물은 평등하다. 약함은 강함이고, 작음은 큼이고, 죽음은 삶이다 - 1/∞ = 0, 100/∞ = 0. 세계는 자(自)와 타(他) 사이를 통과하며 자신을 개봉한다. 물(物)의 관점에서, 행복은 긍정이고 불행은 부정이다. 행복은 사랑과 지복(祉福)에 대응되고, 불행은 고통과 절망에 대응된다. 행복은 자기(自己)와 자기-세계의 합치이다. 이 합치를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예수의 가르침.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 - 싯다르타의 가르침. ‘검토되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 소크라테스의 가르침.
‘너희가 심판받지 않으려면, 남을 심판하지(judge) 말라’ - 예수는 남의 눈 속에 있는 티부터 보는 자를 꾸짖으면서, 먼저 자기 눈의 들보부터 빼내라고 하였다. 바울은 그가 보여준 사랑, 즉 아가페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 사랑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숫타니파타"에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고 하며, 자녀를 가지고자 하지도, 친구를 사귀고자 하지도, 동반자를 만들고자 하지도 말라고 하였다. 이 구절만 본다면, 세속을 떠난 삶만이 정답인 듯하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대목에서는 진리를 아는 친구를 사귀라고 하기도, 모든 세간을 저버림이 없이 걸어가라고 하기도 하였다. 그가 결국 말하고자 했던 바는 탐착(貪着)을 넘어, ‘맑은 고요와 안식, 힘차게 활동하는 지혜’를 얻는 길이 아니었을까? ‘이것’과 ‘저것’, ‘선’과 ‘악’의 저편에서 뛰노는 절대 자유, 즉 소요유(逍遙遊)의 경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라’를 어떻게 조화로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삶은 흐른다. 흐름의 방향을 세로와 가로 방향으로 나누겠다. 세로 방향은 ‘내가’ 걸어가는 방향이다. 가로 방향은 ‘우리가’ 걸어가는 방향이다. 세로의 관점에서는, 나는 모든 탐착을 넘어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야 한다. 하지만 가로의 관점에서는, 나는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홀로 사유하는 ‘나’는 타(他)의 미혹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 함께 삶의 장(場)을 겪는 ‘우리’는 아가페를 실천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경도된다면, 이는 이기심의 산물보다 더 악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모두에게 고통을 주지 않기 위하여, 항상 겸손하게 ‘긴장된 의식’을 지녀야 한다.
차안과 피안을 넘어선 장(場)은 ‘무한한 차이의 세계’, ‘강렬의 세계’, ‘사랑, 자비, 절대 자유, 지복’의 세계라 생각한다. 이 장은 세계의 ‘긍정’과 영원하게 공명한다. 고통, 절망은 유한자가 이 장을 경험하기 위해 반드시 경험해야 한다. 유한자는 무한의 장을 경험할 수 있고, 고통과 절망이 강렬할수록, 이 장도 강렬하게 공명한다. 유한자는 이 세계에 대하여 무지하다. 각자의 경험과 사유를 나눌 뿐이다. 어떠한 유한자의 기록도 이 장을 절대적으로 지시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삶의 선각자(先覺者)라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은 언제나 해체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정신은 이 해체와 재건설로 깊어진다.
‘나는 사랑한다’, ‘나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간다’, ‘나는 의식한다’, 명상으로 이끄는 경구이다. 나를 구속하는 일체에서 해방되며, 나는 내-세계와 합치된다 – 좌망(坐忘). 내면을 여행하며 잠시 무한의 장과 연결-접속된다. 명석판명하지는 않을지라도, 강렬함의 장에서는 어떤 힘이 존재한다. 도(道)가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이유라 생각한다. 끊임없는 연결-접속이 있을 뿐이다 – 실험하기, 지도 만들기. 이러한 삶 속에서 행복을 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