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속-물음표
타인에 대한 무시는 곧 자기(自己)-속-물음표에 대한 무시이다. 타인에 대한 경멸은 곧 자기(自己)-속-물음표에 대한 경멸이다. 타인에 대한 분노는 곧 자기(自己)-속-물음표에 대한 분노이다. 인간은 타인 속에서 자기의 모습을 포착하지만, 세인(世人)의 시선으로 이를 은폐하고 본디-자기의 심경과는 다른 양태로 심경을 드러낸다.
이에 대하여, ‘인간 쓰레기를 경멸하는 게 어떻게 자기-속-물음표에 대한 경멸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라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하여 답하겠다. 인간-존재의 심경은 자기만이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는 점에서 고유함을 지닌다(인간-존재의 일의성). 심경에는 세계의 흔적을 반영되여 고유한 심경의 반응 양태가 형성된다. 범죄자는 법을 어긴 사람이다. 법은 자기를 구속하는 세계의 방식 중 하나라고 ‘교육’되었다. 교육의 근원이 설득이 아닌 명령이라는 사실은 자명하다(‘너는 이거야. 내가 한 말을 기억해’).
명령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명령하는 인간-존재는 타인의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 타인의 심경을 조작한다. 대표적으로 심경에 작용하는, 쾌락과 고통과 같은 유용성의 관념을 조작함으로써 복종을 얻어내는 방법이 있다(‘나는 이거라고 말하면 밥을 먹을 수 있구나, 그럼 나는 이거야!). 법 또한 같은 방식으로 작용한다. 이 법을 지키면, 나는 법규가 허용하는 한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명령-복종 기제는 본디 ‘찜찜함’의 느낌을 낳는다. 인간-존재는 세인(世人)의 시선이 의식에 존재하게 됨으로써 어떤 느낌표를 가지게 된다. 이 느낌표는 세인의 시선으로서 의식을 따라다닌다. 이로써 본디의 심경, ‘?-존재’가 가지는 ‘찜찜함’이 남게 된다(‘왜 나는 이거지? 왜 네가 한 말을 기억해야 하는 거지?’). 물음표는 느낌표에 균열을 만든다. 무시, 경멸, 분노의 심경으로 은폐는 강화된다(‘너는 이거잖아! 대답해! 기억을 못 하는 너는 바보야! 등’). 하지만 은폐가 강화될수록, 본디-자기가 가진 물음표는 반대 방향으로 더 뻗어나가며, 느낌표가 금기시하는 것에의 욕망이 강해진다.
‘느낌표가 금기시하는 것에의 욕망’은 물음표의 형태로 나타난다(‘왜 저거이면 안 되는데?’ 나는 기억하기 싫은데?). 물음표의 누적은 느낌표의 폭발(명령자에 대한 무시와 경멸, 분노)로 이어지게 되지만, 이것이 본디 물음표에 기인했다는 사실은 다시 은폐된다(나는 이거라고! 나는 기억하기 싫다고!). ‘인간 쓰레기’와 비슷한 욕망이 인간-존재의 의식에 상재(常在)함은 자명하다. 누구도 절대적으로 깨끗하지도, 누구도 절대적으로 더럽지도 않다. 물음표와 함께 존재하는 ‘인간 쓰레기’적 욕망은 수많은 명령들에 의해 은폐된다. 어떤 타인-존재가 그 욕망을 행했음이 밝혀져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들’에 의해 ‘인간 쓰레기’라는 칭호가 붙여졌을 때, 인간-존재 속 물음표는 여러 은폐-기제와 섞여 하나의 심경으로 표출된다(쟤는 쓰레기네!).
의식이 희미해질 때, 은폐성이 줄어들 때, 자기-속-물음표는 조금이나마 자유를 획득한다. 느낌표가 강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술을 마시고 자신의 물음표와 대면하며 ‘찜찜함’을 해소하려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은폐는 인간-존재의 생존 방식이지만 물음표-심경을 누르는 방식이기도 하다. 물음표 존재를 개봉하는 것이 좋은 삶의 양식이라고 말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은폐하고 있는 어떤 존재의 정체는 인지해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