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우의 사유를 따라서
어떤 이에 따르면, 철학은 담벼락에 걸터앉아 온 우주를 헤아리는 학문이다. 이는 적절한 비유이다. 철학 그 자체로는 진리를 산출하지 못하지만, 철학은 진리-구조의 존재 양태를 헤아리며, 묘사할 수 있다. 철학은 진리 탐구에 목적을 둔다.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이 골머리를 앓았고, 각자의 사유와 삶의 체험 속에서 나름의 답을 기록했다. 진리는 무한성이다. “진리란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긍정형의 답을 내놓는 자들은 ‘영원함’이 세계에서 나타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영원함’은 무한과 연관되어 있다. 무한은 수학에서 엄밀하게 다뤄지는 주제이며, 이에 대한 나의 무지로 인해, 이후 수학이 영원함을 다루는 방식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여기서, 무한은 “세계를 초월하는가, 혹은 세계에 내재하는가?”라는 질문 또한 끊임없이 제기될 질문이다.
이에 대해서 나름의 사변으로 내놓은 답은 다음과 같다. 우선 t(시간)축의 수평선을 긋는다. 수평선에서 점 하나를 적절히 표시한다. 그렇다면, 그 점을 기준으로 좌측은 과거가 될 것이고, 우측은 미래가 될 것이다. 현재는 그 점이다. 점은 수학적으로 공간을 가지지 않는다. 현재는 포착될 수 없으며 그저 흘러가는 점이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미래는 다가올 현재이다. ‘시간’에 무한은 내재하는가? 수평으로 흘러가는 한 지점에 수직으로 직선을 그었을 때, 수직선은 무한을 향해 개시된다. 과거의 점이든, 현재의 점이든 이 수직선이 심경(心境)에 접속되는 순간, 인간-존재는 무한의 강렬함을 체험할 수 있다.
우리는 영원히 존재하지는 못하지만, 영원을 경험하며 살 수는 있는 것이다. 영원성은 강렬함의 형태로 존재한다. 철학은 삶에 그어진 수직선을 탐구하는 학문이다. 세계에 더불어 존재하는 인간들 모두가 철학을 배우지는 않을지라도, ‘철학함’을 배운다. 우리 모두 영원성의 물음표 앞에 던져진 유한자이다. 바디우는 철학이 예술, 정치, 과학, 사랑에 근거를 둔다고 말한다. 영원함은 아름답기에 예술의 형태로 표현되고, 영원함은 명료하기에 과학의 형태로 표현되고, 영원함은 힘이기에 정치의 형태로 표현되며, 영원함은 강렬한 이끌림이기에 사랑의 형태로 표현된다. 철학은 이 모두를 아우르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진리가 존재함을 부인하려는 현대 사회에서, ‘진리’의 영원성은 더 그 가치를 지닐 것이다.
철학을 무효화하는 시도가 판치는 시대에, 철학은 어떤 역할을 할 것이고, 각 개인은 어떻게 철학할 것인가, 그 답은 각자에게 펼쳐지는 삶의 현장에 있으리라. 모두가 철학을 할 수 있고, 모두가 각자의 영원성을 기록할 수 있고, 영원함을 체험할 수 있다. 각자가 체험한, 은폐되지 않은 영원성을 개시하는 삶에서 자신만의 물음표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 배타성의 느낌표를 넘어선 보편성의 물음표를 마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