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시지프 Oct 01. 2023

「양심의 부름」

존재와 시간을 읽고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우여곡절 끝에 완독하였다. 이 책이 대강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해하였으나, 정교한 사유의 과정을 따라가는 데는 실패한 독서였기에 다시 한번 읽어볼 생각이다. 하이데거가 쓰는 ‘존재와 시간’이라는 용어가 일상언어에서 쓰는 ‘존재와 시간’과는 꽤 괴리감이 있어서 독해하는 데 어려움이 컸던 것 같다. 일단 나의 이해에 따르면, [존재와 시간]을 ‘시간성의 지평에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 가능성을 탐색함’으로 요약하고 싶다.

 내 이해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현존재가 본래적으로 실존하기 위해서 제시한 조건은 ‘양심의 부름’을 마주하는 것이다. 여기서 ‘양심’은 통속적인 관점에서의 양심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양심을, ‘그들-자기’가 은폐한 본래적 자기(自己)를 향한 마음-씀이라고 해석하였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실존은 ‘존재 가능으로 존재함’이다. 그러므로 비본래적 실존도 가능하고, 본래적 실존도 가능한데, 하이데거는 둘 중 어떤 것의 우월성을 말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일상에서 현존재는 대개 일상성에 ‘빠져’ 본래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실존하며, ‘죽음 앞으로 미리 달려가 봄’의 방식으로 양심의 부름에 마주할 수 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죽음은 현존재 자신의 고유하면서도 무연관적인 가능성이다. 그는 일상의 애매함이 아닌, ‘있음과 없음’이라는 극단성에서 본래적 자기의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일상에서 세계에 빠져버린 현존재는 세계-내-존재를 은폐하는데, 그 예로는 ‘잡담, 호기심, 애매함’을 들 수 있다. 일상에서 현존재는 세계에 빠져서 자기를 망각하며 존재한다. 이는 사르트르가 [존재와 무]에서 말한 ‘자기기만’의 모습과 비슷한데, 결국 인간은 ‘진정한 자기’를 대면하기가 두려워 자신을 기만하며 진정한 자기를 잊는다는 논지이다. 

 ‘죽음을 향한 존재’인 현존재는 죽음으로 앞서서 달려 가봄으로 인하여, 죽음이라는 그 자신의 고유한 가능성에 대면하고 ‘불안’을 느끼는데, 불안은 두려움과 달리 그 대상이 무(無)이다. 이러한 불안을 ‘세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치환해 스스로를 잊는 행위는 ‘자기기만’에 해당한다. 현존재는 불안을 느낌으로써 그 자신의 고유한 존재 가능성을 포착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이와 관련하여 ‘시간성’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 서술이 정말 난해하서, 다시 한번 읽고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이해에 따르면, 하이데거가 말하는 ‘시간성’은 현존재 자신의 존재 이해에 따른, 개별적 개념인 듯하다. 그는 현존재가 본래적으로 실존함으로, 시간성이 현존재 고유의 운명을 개시하는 바를 붙잡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하다. 내 이해에 따르면, 그는 본래적 실존의 방식으로 “침묵”을 제시하는데, 현존재는 침묵과 고독 속에서 고유의 가능성을 포착하고, 자신을 이해하며, ‘결단’한다.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 이해를 기반으로, 다시 일상으로 나아가 비본래적 실존 속에 자신이 ‘결단한’ 가능성을 개진할 수 있다. 

 침묵 속에서 ‘양심’은 현존재를 부른다. 현존재는 자신이 세계에 내던져졌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그들-자기’가 말하는 양심과는 다른 ‘양심’의 부름 앞에, 양심 없어 보이는 것이 ‘양심’을 가지는 것일 수 있다는 사실 앞에 선다. 시간성이 펼치는 운명은, 양심의-부름이라는 양태로 현존재의 본래적 실존 가능성을 죽음 시점까지 개시한다. 그러므로, 현존재는 그때그때 불안의 순간과 대면할 수 있고, 그때그때 본래적 자기(自己)를 망각할 수 있으며, 그때그때 양심의 부름에 나름대로 응할 수 있다. 머리에서 정리가 쉽지 않아 애를 먹고 물음표가 많이 남았지만, 현상학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은은한 광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