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존재가 근원적으로 세계와 관계하는 방식은, ‘기분’이다. 기분에 따라 세계를 향한 태도가 달라진다. ‘근원적 태도’에 대한 당위성으로 그 태도의 흔들림의 정도가 작을 수는 있지만, 태도 자체가 변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無常]. 기분과 상황은 그때그때 셀 수 없이 많은 ‘태도’를 산출한다. “그들[世人]”은 태도의 비일관성에 경멸의 시선을 보낸다. 일관성은 ‘질서’를 향하고, 비일관성은 ‘혼돈’을 향한다. 존재 그 자체는 혼돈이다. 순수한 실재는 혼돈이다. ‘질서의 옹호자’는 ‘혼돈을 은폐함 없이 주시하는 자’에게 광인(狂人)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광인은 순수함의 강렬함에 끊임없이 이끌리는 자가 아닐까? ‘혼돈’ 그 자체에 매료되는 자는 고통에 휩싸이기 쉽다. 들뢰즈 또한 이 점을 경고한다. 강렬한 욕망의 리좀-되기가 “파시스트적인 것, 자살적인 것, 착란적인 것”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실험’을 통해 자신의 지도를 제작하라고 권유한다. 분열자(광인)-되기를 실천하려는 자는 파시즘을 추종하지 않고, 자살에 매료되지 않고, 착란에 휩싸이지 않는 절도(節度)를 지녀야 한다. 분열 그 자체를 긍정함은 참된 자유를 향유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지만, 자유에 중독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은은한 광기’는 욕망에 중독되지 않는 길일 수 있다. ‘은은하다’는 ‘겉으로 뚜렷하게 드러나지 아니하고 어슴푸레하며 흐릿하다.’라고 정의된다. ‘은은한 광기’는 자신의 ‘?-존재’의 가능성을 은폐하지는 않되, 그 가능성을 전적으로 없애려 하지 않음으로 드러난다. 인간은 그 자신이 가진 고유한 가능성으로 실존한다. ‘은은한 광기는’ 억압과 착란의 적절한 해독제일 수 있다. 그로써 인간-존재는 세인의 시선이 부과하는 무거움에서 해방될 수 있고,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에 스스로 선택한 무거움을 부과할 수 있다.
순수한 질서는 강박적이다. 순수한 혼돈은 히스테리적이다. 순수한 질서는 “1”이고, 순수한 혼돈은 “n-1”이다. 인간-존재는 근원적으로 자유를 갈망한다. 자유는 “그들”의 시선에서 ‘비일관된 행위’를 허용한다. 파멸을 부르지 않고 절망을 부르지 않으며 배려하는, ‘은은한 광기’는 도리어 ‘행복의 길’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