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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지프 Jan 11. 2024

철학과 ‘철학함’

부조리의 인간들을 위하여

 철학(哲學)이라는 한자어의 의미는 ‘밝히는 학문’이다. 철학은 영어로는 ‘Philosophy’인데, 이는 ‘Philo- + -Sophia’의 구조로 된, ‘지혜를 사랑하는 학문’이라는 뜻이다. 같은 어근으로, 소피스트(Sophist)는 본디 ‘지혜를 아는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우리는 철학을 배울 수 없고, 기껏해야 ’철학함‘만 배울 수 있다.’라는 말을 했다. 철학과 철학함은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은 누군가에게는 익숙할 수 있지만, 나는 이 말이 철학의 가치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위의 질문에 대한 나름의 답을 해보겠다. 철학은 학(學), 즉 ‘배움의 대상’을 의미하는, 명사라고 볼 수 있다. ‘철학함’은 ‘배움의 능동적 과정’을 의미하는, 동사라고 볼 수 있다. 철학은 진리의 ‘움직이는’ 측면을 본다. ‘철학하지’ 않고, 철학만을 학문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대상이라고 볼 때 우리는 독단론 혹은 회의론의 유혹에 쉽게 빠지게 된다. 철학은 독단론 혹은 회의론으로 기울지 않도록, 이항 대립의 ‘사이’에서 자신을 열어 밝히는 빛을 보아야 한다. 이 ‘사이 공간’이 고정된 중심으로부터 끊임없이 도망가는 모습을 포착해야 한다.

 프로이트는 리비도의 고착을 우울증의 원인으로 보았다. 라캉은 우울증을 ‘기표(욕망)의 환유가 과하게 느려진 상태’라고 표현하였다. 인간이 자신의 이성과 감성으로 비행하기를 멈추고, 타인 일반(이하 줄여서 타인)의 욕망이 그것을 대체할 때 기표의 환유는 느려진다. 주체(Subject)는 자신만의 공백(∅)이 발현하는, 기표의 연쇄 고리를 가진다. 그러나 그 공백을 자신이 아닌 타인이 주입한 욕망으로 막으려고 할 때, 주체는 자신의 빛을 잃는다. 개인은 각자의 삶 속에서 각자의 진리를 가지고, 그 진리를 열어 밝히는 방식으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불행의 지속은, 주체의 기표가 타자의 담론에 짓눌린 결과이다. 이는 누군가에게는 ‘철학하지 못함’의 결과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는 무엇을 원해도 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지 않고, 그저 ‘상식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어떤 답을 자신의 답으로 취하는 태도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이런 사람에게는 엉켜버린 기표의 고리를 푸는 삶이 ‘윤리적인 삶’일 수 있다. 어떤 이는 ‘새로운 삶만이 윤리적이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이를 바꾸어 ‘어떤 이에게는 새로운 삶만이 윤리적이다.’라고 말하고 싶다. 상식에서 모순을 발견할 수밖에 없고, 체계에서 모순이 자꾸만 보이고, 부조리한 것들에 자꾸만 이끌리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는다. 이런 ‘부조리의 인간들’이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철학함’이 적극적으로 권해져야 한다. 스스로가 철학자가 됨으로써 ‘역설적으로 약자가 강자보다 자유로울 수 있음’을 보여야 한다.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철학자는 어떤 ‘당연함’에 저항할 수 있는 자다.

 물론, 이러한 ‘철학함’에도 절도(節度)가 필요하다. 어떤 체계가 ‘있음’과 ‘없음’ 어느 한쪽만 강조할 때, 필연적으로 공백이 드러나고, ‘부조리의 인간들’은 이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뭔가 이상한데?’라는 직감을 무시하지 않고, 자신의 이성과 감성을 활용하여 자신만의 결론을 내는 것에서부터 ‘철학함’은 시작한다고 믿는다. 부조리의 인간들에게는 자신만의 날개로 날아야만 한다는, 가혹한 운명이 주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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