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억 개의 기준, 그리고 나의 길

바르셀로나, 가우디 투어가 남긴 질문

by 장이엘

나는 자유여행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가끔 패키지여행을 선택한다.


스페인을 여행할 때도 그랬다.
바르셀로나의 어느 가을날,

가족의 의견에 따라 ‘가우디 투어’를 신청했다.


이른 오전, 광장에서 가이드를 만나면

패키지 투어는 시작된다.


그는 마치 피리 부는 사나이 같았다.

모든 일행은 묻지도 않고, 그의 뒤를 따랐다.

정해진 순서, 정해진 속도, 정해진 감탄.


잠시 멈춘 틈에, 그가 말했다.

“바르셀로나에선 꼭 환타 오렌지를 마셔야 해요.”

그의 말대로 한 병을 들고 투어를 계속했다.


사진 명소에선 포즈까지 알려준다.
‘인생샷’ 미션을 성공한 사람들은 무척 만족해했다.


그가 추천해 준 레스토랑에 가서 빠에야를 먹고,

구엘 공원과 사그라다 파밀리아를 돌았다.
버스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눈을 감는 시간까지
여행은 정확하게 흘러갔다.


불편하지도, 불안하지도 않았다.
고민도, 선택도 필요 없었다.
그저 누군가가 미리 짜둔 동선을 따라

움직이기만 하면 되니까.


완벽한 하루였다.

그런데, 어쩐지 나는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혹시 우리는, 모두 패키지여행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건 아닐까?


패키지 인생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취업, 결혼,

출산, 자녀교육, 퇴직, 노후.

정답처럼 보이는 코스가 존재하고,
많은 이들이 그것을 ‘정상’이라 부른다.
나도 그 안에 나를 맞추려 애썼던 시절이 있다.

조건은 그럴싸했지만, 늘 어색했다.


마치 해변에 조금 더 있고 싶지만,
투어팀이 이동하자고 하면

일어설 수밖에 없었던 여행자처럼.


원하는 속도는 따로 있는데, 그저 맞춰가는 삶이었다.


그러다 한국을 떠나 세상의 다른 방식들과 마주했다.
누구도 틀에 박힌 정답을 말하지 않고,

모두가 제각각의 리듬으로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


그 속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토록 견고해 보이던 인생의 구조는
사실 누구도 강요한 적 없었다는 걸.
같은 길을 걷지 않아도 괜찮다는 걸.


82억 개의 기준, 그리고 나의 길


세상에는 82억 명의 사람이 있다.
그만큼의 삶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중요한 건, 어떤 인생이 옳은가? 가 아니라,

그 길이 ‘나에게’ 맞는가이다.


누군가는 안정되고 정돈된 일정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누군가는 예측 불가능한 여정 속에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누군가는 타인이 설계한 길에서 평화를 얻고,

그들과 함께하는 발맞춤에서 안정감을 느낀다.


누군가는 오직 자기만의 지도를 그려가며

삶의 중심을 찾고, 자신만의 길을 개척한다.


옳고 그름은 없으며, 기준은 절대적이지 않다.

문화도, 기후도, 음식도, 언어도 다르듯이

인생의 목적도, 삶의 방식도 다 다르다.


모든 선택과 방식에는 장단점이 있으며,

그곳에 우열은 없다.


나는 묻고 싶다.
-당신은 지금, 누구의 여정을 걷고 있는가?
-그 설계자는 누구인가?


나는 이제 나만의 길을, 나만의 속도로 걷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나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다만 당신이 진짜 원하는 여정이 무엇인지,
그 질문만큼은 스스로에게 정직하게 던질 수 있기를.

그것이 패키지여행이든, 자유여행이든,


그 길 위를 걷는 이유가 타인의 기대도,

사회의 권유도 아닌,
당신 자신의 선택에서 비롯된 것이기를 바란다.


속도는 느릴 수도 있고, 길은 돌아갈 수도 있다.
때로는 멈춰 설 수도 있고, 잠시 길을 잃을 수도 있다.


지도를 잃어도, 가이드를 만나지 않아도,

설계자는 여전히 나 자신이라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삶은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오히려 인생의 경험치는, 그만큼 더 깊어질 것이다.


나는 지금,

자유여행이라는 이름의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다.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다.


길을 잃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내 걸음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조금씩, 그러나 분명히 배워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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