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항로를 벗어나, 나의 궤적을 남기다

하늘을 지나, 땅 위에서 다시 시작한 전직 승무원의 마라톤 도전기

by 장이엘


엄마와 동생과 함께 바르셀로나를 여행했을 때
몬주익 언덕에서 1992년 올림픽의 흔적을 마주했다.


돌에 새겨진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선수의 모습.


그때의 나는 마라톤과는 아주 거리가 먼 사람이었기에

그저 한 시대를 빛낸 영웅의 흔적이자,

모두가 존경할 수밖에 없는 의지의 상징으로

바라보았다.


게다가 42.195km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다가가기 힘든 벽처럼 느껴졌다.


낯선 도시의 언덕에서 무심히 바라보던

그 기념비가 시간이 흐른 지금,

나에게는 더 이상 멀게만 보이지 않는다.


이제 그것은 내가 도전해야 할 길,

그리고 새로운 세계로의 초대장처럼 다가온다.


이제 나는 트랙 위를 달리며
생애 첫 마라톤에 도전한다.


10km로 시작하지만, 언젠가는 42.195km를
완주하리라 믿는다.


매일 연습을 하면 그 믿음은 더 깊어진다.
3km쯤 달리다 보면 호흡이 안정되며
나만의 리듬이 깨어난다.
호흡이 깊어지며 생각이 정리되고,
심장의 박동과 함께 몸이 깨어난다.


속도를 높이지 않아도,
거리를 늘리지 않아도 괜찮다.


누구와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해야 할 성과도 없다.


호흡과 리듬에 집중하는 그 순간,
나는 가장 온전히 나 자신이 된다.

그저 숨과 발걸음을 이어가며
내 안의 리듬을 확인할 뿐이다.



황영조 선수의 말을 떠올린다.


“가장 인간적이고 원초적인 운동이 마라톤이다.
달리면 살고 누우면 죽는 게 인생이다.”


청춘의 힘으로 잠깐 달리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꾸준히 나만의 속도로 달리고 싶다.


100세에 토론토 마라톤을 완주한 파우자 싱,
84세에 보스턴 마라톤을 완주한 달린 조니 켈리,
92세에 호놀룰루 마라톤을 완주한 글래디스 버릴

86세에 토론토 마라톤을 완주한 에드 휘틀록.


그들의 기록은 단순한 기네스북이 아니다.

삶을 진정으로 사랑했고,

노력 또한 멈추지 않았다는 증거다.


마라톤은 기록이나 성과의 경쟁이 아니라,
나만의 리듬을 찾고 지켜내는 긴 여정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완주하면 된다.

그 사실을 떠올리며
오늘도 호흡과 발걸음을 느리지만 꾸준히 이어간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내 몸과 마음은 조금씩 단단해질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하늘과 땅을 오가며 살았다.
새벽의 활주로, 창밖으로 펼쳐지던 구름의 바다,
도착지마다 달랐던 공기와 사람들의 얼굴.


날개를 단 듯 비행하던 그 시간은
내게 자유와 배움의 선물이었다.


비행이 내게 날개의 시간을 주었다면,
마라톤은 내게 리듬의 시간을 주고 있다.


날개와 리듬, 두 선물이 만나
나는 오늘도 새로운 길 위에 선다.


타인이 설계한 항로를 따라

구름에 흔들리던 비행시간을 지나,

이제는 단단한 땅 위에서 나만의 궤도를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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